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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중현 Nov 10. 2024

글쓰기가 농업을 살린다?

농업은 긴 맥락을 이해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중요성에 대한 글을 하나 보았던 것이 기억이 났다. 딸아이와 오래간만에 한자리에 앉았다. 딸아이는 국제학교 시절, 어느 학생보다도 언어실력이 좋았다. 책을 많이 읽고 좋아했다. 스스로 글쓰기도 좋아해서, 학교 성적 이상의 인정을 받았다. 또래 네이티브 친구들보다 글을 잘 쓴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마음 편하게 이야기했다. 


"미래에는 글쓰기가 더 중요한 능력이 될 것이라고 하는 글을 봤어. 공감되더라. 사람들이 단편적인 동영상, SNS, AI 등에 의존하여, 깊고 체계적인 생각을 못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글쓰기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고 구매하는 것도 사실상 한계가 있다는 것이지. 그리고, 결국 글쓰기는 계속 구매하는 방법으로 해결해 나가기는 쉽지 않은 데다, 글 쓰는 사람이 구매자의 생각을 지배하게 되므로, '글쓰기=권력'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글쓰기는 정말 권력이나 정치와 밀접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몇 정치인들이 글을 잘 못써서 판단력이 흐린 경우를 왕왕 보게 된다. 글쓰기나 첨삭을 주변에 맡기다가 망신을 당하고 권력을 상실한 경우도, 우리는 최근에도 경험하였다. 글쓰기 능력이 사회생활에서의 유불리를 결정하는 것은 근미래(사실 더 빨리 진행되는 영역은 이미 나타나고 있지만)에 격차가 더 커질 것 같다. 


한편, 나는 학생들과 상담을 할 때, 영어 실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영어는 미국어가 아니라, 과학계에서는 공용어란다. 그리고, 국제 무역이나 협상에서 실제로 기본 언어로서 인정되고 있기 때문에, 기업이나 정부를 포함한 그 어디에서 어느 주어진 수준 이상의 업무 능력을 발휘하려면, 영어 실력이 늘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세계가 연결되었기 떄문에, 바른 정보를 직접 골라 보려고 해도 영어 실력이 기본 능력이다. 영어는 신분을 가른다."


그런데, 이 말에 좀 더 수정을 가해야겠다. 


"우리말로 된 글쓰기를 더욱 많이 해 보자. 읽기 쉽게 생각의 왜곡 없이 전달이 가능한 글쓰기를 계속해 보자. 난해하고 복잡한 글을 쓰거나 지나치게 단순하고 편협한 글을 쓰게 되는 이유는 본인의 생각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말 글쓰기를 잘하면 그다음에 영어 글쓰기를 해 보자."


강의 시간에 나는 인기가 없을지도 모른다. 시험은 죄다 서술형 문제로 출제된다. 따라서, 학생들은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핵심을 잡지 않으면 점수를 받기 힘들다. 한 학생은 성적 공개 후, 자기 점수가 낮은 것 같다며 이의신청을 해 왔다. 안타깝게도 그 학생은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을  두 줄 이내로 정리해 내지 못했고, 핵심어를 생각해 찾아 넣지 못했다. 


실험과 실습 강의는 모두 영어로 진행된다. 내용도 영어, 실험조교도 외국인, 시험 문제도 영어로 출제된다. 아예 읽고 이해를 하지 못하여 답을 쓰지 못한 학생도 있는 것 같다. 그러하니, 나의 강의평가 점수가 좋을 리 없다. 그럴까봐 강의계획서에 영어로 강의한다고 써 놨지만, 전필 과목을 피할 수 없는 학생들의 불만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학생들은 육종과 종자를 공부하는 과목에서 영어가 발목을 잡는다고 불만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강의하는 다른 과목도 비슷한 상황이다. 교양 과목 '먹고 즐기는 자연'의 강의 추천 관련한 내용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글쓰기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듣지 마라. 글쓰기 능력이 성적에 반영된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그 학생이 아마도 훗날 자신이 그 강의를 들은 것을 후회하지 않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나는 글쓰기 능력을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글쓰기 형태로 답안을 작성하게 하지만, 핵심어가 들어가면 충분한 점수를 주기 때문이다. 교양 과목을 듣는 학생의 전공이 다양해서, 나는 어느 특정 학과가 유리하지 않게 한다. 그것을 위하여, 글쓰기를 해야 하는 시험의 비중은 40% 미만 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50%는 평소의 활동 평가와 다양한 발표, 과제 등의 성적에 따라 결정된다. 


소위, '강의평가 하위 20% 교수'의 강의는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강의준비에 시간을 많이 쓰지 않는다. 강의준비를 지나치게 열심히 하니, 내용이 빡빡하게 많아졌던 것 같다. 그래서, 처음 준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다음부터 내 기억에 의존하여 강의한다. 더 원활하고 부드럽게 강의가 가능해졌다. 그 덕에, 하위 15% 이내까지 내려갔던 강의평가 성적은 이제 하위 40% 수준까지 올라갔다. 


상대평가를 기본 요건으로 하는 현행 강의평가 제도는 글쓰기를 소홀히 하고 논쟁적 요소를 배제하였다. 우리 세종대는 고교 성적 2등급 전후의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한다. 그런데, 그 학생들의 글쓰기와 토론 능력은 미안하게 생각하는데, 종종 실망스럽게 생각한다. 학생들은 잘 말하려 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아무리 자극을 하려고 해도 답답한 마음이 들곤 한다. 아마 그것은 다른 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학생들의 고교 시절 공부가 사고의 발전을 유도하는 학습과 글쓰기가 결여된 공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행 대학 입시에서 그토록 멋진 자소서를 써 왔던 학생들이 왜 이럴까. 나의 두 아이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공부를 하였다. 미국인들이 설립한 국제학교였는데, 내가 국제기관 직원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그 학교로 입학을 시켰다. 공부 대부분이 글쓰기와 토론하기를 기반으로 하였다. 책에 있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 학생은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 자신 스스로 조사하고 고민하고 토론해서 체계화하여야 했다. 그러나, 이 두 아이는 우리나라에서 실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외국 학교에서는 honor 등급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소위 두 아이가 한국 명문대를 가지 못한 것에 대하여, 조금은 속상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참으로 기특하게 생각한다. 그 흔한 과외 한 번 안 받고, 우리말로 된 공부를 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한국에 와 각기 중1, 고1부터 시작하면서도, 자기 전공을 스스로 찾고,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잘 다녔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에 두 아이에게 그런 말을 했다. 


"더 큰 곳에 갈 수 있잖아. 그러길 바라. 글쓰기를 잘하고, 토론을 잘하고, 창의적인 학생은 그러한 문화가 있는 곳에 가서 공부해야 돼. 그 능력들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아야 능력이 함양돼."


한편,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한국의 노벨과학상 이야기가 종종 언론에 등장한다. 그러나, 난 우리나라의 노벨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노벨상은 그 사회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회 문화'를 가지고 있어야 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비견한 예로, 우리나라 스포츠 스타들의 등장도 그러했던 것 같다. 어쩌다 스타 한 명이 나오면, 그 분야가 원숙한 수준에 올라간 줄 아는 대중적 착각이 생긴다. 그러나, 언론과 대중에 의한 '정보'로 소비되고, 교육 상품으로 변질되고 말았던 것 같다. 결국, 사람들은 결국 후속적인 성장에 소홀하게 되고, 해당 분야가 오히려 퇴보하는 것을 보곤 했다. 


그러나, 아주 '다행(?)'히도 노벨상을 쉽게 수상하는 일은 안 생길 것 같다. 수학계의 노벨상인 '필즈상' 주인공인 허준이 박사의 수상 이후에도 수학과 기초과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아주 조금 늘었을 뿐이다. 내 생각에, 노벨상이 대단한 것은 과학적 평가보다도 그 상이 주는 반향과 이슈로서 더 큰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정책 결정이 이벤트에 과하게 의존하는 현상을 보인다면, 노벨상이 과학기술계에 반드시 축복이 될 것 같지만 않다는 것이 내 기우일까?


나는 과학기술이 막연히 무엇인가 돈을 주고 상품을 구매하는 듯한 정책에 의한 지원을 받는 것보다, 아이를 키워나가는 마음으로 관련 문화를 키워나가는 사회적 진보로 가능해지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자마자 일을 시킬 것인가? 하기사, '올리버트위스트'에서 보이는 근대 영국처럼, 4-5살짜리 아이들까지 노동 착취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처럼, 어느 사회나 야만의 시대가 있었겠지만, 현재 우리는 그런 시절을 현명하게 지나 보냈으니, 이제는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뭐가 중헌디?'


나도 농업과 식량 부분의 과학기술 정책 관련하여 그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는 나이가 되었고, 의견을 피력하게 되는 기회가 생기곤 한다. 그런데, 아마도 과학기술 발전을 기본으로 한 현대 사회에서, 의약이나 기타 공업보다도 농수산업은 가장 난이도가 센 영역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물을 다루고, 계절을 다루고, 사람의 욕망과 기호도를 다루며, 국내외 정세에 따르고, 환경과 기후 등의 변수가 관여하는 그런 산업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찌 단순한 술책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 사회의 성숙도가 전제되는 산업이야말로 '기반생명산업'인 '농수산업'일 것이다. 


즐겨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요즘 각자 책 한 권씩 내고 그런다. 정책, 기술, 환경, 소비자 그런 부분의 전문 서적을 내는 반면에, 나는 학생들을 위한 입문서 정도의 교양서를 내 보았다. 다음에는 전문 서적을 하나 내 보려고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이들과 소통하고 내 의견도 정리해 보는 과정에서, 농수산업은 어느 책 한 권 봤다고, 테마 꼭지 던진다고 해결되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다. 


국내 GDP의 약 2%를 차지하는 농업을 위하여, 저 거대한 농림축산식품부와 농촌진흥청이라는 양대 기관이 존재하고, 농협과 여러 개의 농업 관련 공사가 존재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효율화를 위하여 조정되고 정리되어야 할 부분이 있겠지만, 그것 자체의 규모를 대폭 축소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특히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도시는 절대로 혼자 존재할 수 없다. 만약, 농촌에서 농업 생산을 하지 않으면, 그 많은 식량을 죄다 외국에서 수입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식량 가격에 부하가 걸리고, 도시는 생존할 수 없다."


서울과 경기도, 부산과 경남, 세종시 사람들은 특히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농촌이 붕괴하면 도시는 모두 붕괴한다.


글쓰기를 하지 않는 세상, 깊고 체계적인 사고가 어려운 세상, 그런 세상에서 농식품산업은 소외되고 있다. 그 복잡성을 점점 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농업이 어려워지는 이유 중에 일반 대중, 특히 도시민들의 무심함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 무심함은 큰 맥락의 사고가 결여되어 가는 것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한다.


글쓰기를 하는 것이 우리 농업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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