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중현 Dec 14. 2024

현재가 미래를 도울 수 있는가

소수가 전체를 구할 수 있는가.

지친 금요일. 남은 일들이 뒤에 서 아우성인 금요일 저녁. 마지막 미팅을 6시에 마치고 집에 들어왔다.

나도 털끝만큼도 시간과 돈을 허투루 낭비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분주함을 과시하지도 강요하고 싶지도 않다. 그 증거로 반드시 나에게 휴식과 위안의 시간을 준비하며, 나를 맞이하는 택배 박스 안의 음반들은 그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


'극우 유튜버'의 길을 걸으신 우리 불쌍한 대통령은 전형적인 'brain rot'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정보와 미디어가 제 역할을 하던 시대가 얼마나 되었냐만은 그것은 민주주의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몸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바로 깨달을 수 있는 이치가 있지만, 정신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참 판단하기 어렵다. 사회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 개념조차 명확하지 않다.


몸이 성숙한다는 것은 것은 세포의 성숙과 무관하다. 세포는 계속 그 짧은 생을 반복하는데, 어느 단계의 세포들이 전체의 주류를 이루는가가 우선적인 판단 근거로서 몸의 한 조직, 기관, 나아가 전체의 성숙을 설명한다.


그런데, 이렇게 성숙한 몸이 미쳐버린 두뇌의 지배를 받으면 성숙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온다. 머리에는 바깥 환경과의 정보 소통과 판단을 하는 기관들이 집합되어 있다. 사회라는 동물의 머리는 '미디어'라는 소통과 감각 기관, '정치'라는 뇌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게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동물은 살아 움직일 것이다.


뇌는 판단하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재된 것은 거의 없다. '원래' 그런 것이 있다기보다는 끝없는 외부와의 소통 구조에서 형성된 '그 무엇'에 가깝다. 결국 우리가 믿는 '자아'마저도 사실은 충분히 객관적이고 본인이 믿는 자아와 충분히 분리가 가능하다. 그래서 '미치는 것'이 가능하다.


미쳐버린 뇌를 가진 몸은 생사를 결정할 수 없다. 떼어내도 놔둬도 죽음뿐이다. 시간이 결정할 뿐. 이제 몸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나마  '의사의 처방과 치료'가 유일하다. 적절한 시간에 정확한 방법으로, 필요하다면 뇌 안의 썩어버린 생각을 담고 있는 세포들을 도려내거나 기능을 마비시켜야 한다.


뇌세포는 반복적인 특정적 정보 처리를 반복하면 특정적인 코드의 행동을 반복하게 한다. 익숙함을 통해 생존 능력을 높이는 뇌의 진화 방식이다. 이를 통해, 개체는 학습 능력을 통한 문명을 이룩했지만, 동시에 종종 발생하는 미치도록 매력적인 '광적인 이론'에 경도되어, 세상을 광란으로 이끌도록 세뇌되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이 둘의 차이를 모른다. 활자의 매력에 빠져, 삐이라와 전단의 힘에 눌려, 쪼가리 사상과 주술적인 암기 노트에 몰입하여, 시험을 보고 대학을 가고 그렇게 무비판적인 집단 논리를 기반으로 광란의 체계를 구축한다.


그렇게 형성된 생각들의 파편이 그럴싸한 접사와 조사로 연결되고 강력한 수식어로 꾸며져, 해독이 불가한 '그들만의 선언문'이 되어 퍼 날라진다.


----


나는 이 앨범이 너무 좋다. Porcupine Tree의 Fear of a Blank Planet. 엄청난 정보와 디지털화된 소통에서 우리의 해방구는 어디일까. 그 안에서 나, 우리, 우리 인간들은 무엇으로 남을까.


https://youtu.be/G9Dyy1oNkyk?si=0w3Aw40kY67yciQF



한강 작가는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고 했다.


과연, 현재가 미래를 도울 수 있는가, 소수가 전체를 구할 수 있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