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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rai Jun 11. 2020

[木] 먹먹한 초점-펜탁스 MX와의 마지막 인사

공통주제 - ‘필름카메라’



-결합 부분이 눅눅해져 초점을 잘 잡지 못하는

펜탁스 MX에게 지난 감사를 표하는 글-



올해 이별 수가 있다더니,

아직 올해의 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예상치 못한 이별이 몇 있었다.


필름 카메라와의 이별이 그중 하나인데,

아직 제대로 고쳐보진 않았지만 고치더라도

앞으로 이 카메라를 쓰지 않을 것이다.

회피형 인간은 이렇게 카메라와의

관계에서도 열심히 도망친다.




‘#감성사진, #색감’ 해시태그를 달아가며

필터 입힌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나를 보고

친구 가영이가 필름 카메라에 대해 알려주었다.

인터넷에서 초보자용으로 추천한

미놀타나 캐논을 살 생각으로 매장에 갔는데,

내가 알고 있던 반자동 필름 카메라들과는 다르게

모든 게 수동으로 작동되는 펜탁스 MX에 매료되었다.

(물론 펜탁스 MX 말고도 ALL수동인 필름 카메라는 많다.

그땐 몰랐지!)


그리고 그다음 해,

필름 카메라를 들고 유럽여행을 가게 되었다.

가방 한편 가득 들어있는 필름 속을

모두 좋은 사진으로 채우리라 다짐하며.


이전 여행과는 다르게

필름 카메라와 함께하는 여행 중엔

쉽게 스쳐 지나갈만한 작은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 늘 주위를 눈으로 누르듯 바라보았다.

작고 소중한 것-1
작고 소중한 것-2
작고 소중한 것-3


여행을 대하는 나의 태도뿐만 아니라

주변의 흐름 또한 이전 여행들과는 달랐다.

드레스덴에서 프라하로 가는 기차 안

나와 같은 펜탁스 MX를 들고 있는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같은 카메라 기종을 쓰진 않더라도

필름 카메라를 쓰는 또 다른 친구를 알게 되기도 했다.


필름 카메라를 메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던 사람과

서로의 사진을 계속해서 보기 위해

연락을 이어가게 되었다.


나와 같은 기종의 필름 카메라를 쓰던 Uki.


생각해보니 필름 카메라를 고장 낸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유럽 여행의 마지막 날 공항에서

카메라 스트랩이 풀려 필름 카메라를 떨어트렸었다.

그땐 필터가 으스러지고 렌즈 겉 부분이

뭉개지기까지 했는데,


그렇게 열심히 고쳐놓고,

이제는 고작 초점을 잡는 부분 이음새가

고장 났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카메라를 포기하게 되었다.

정말 나다운 헤어짐이다.


나의 첫 필름 카메라는

매일이 귀찮고 의미 없이 느껴지는 나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주었다.

마치 세상을 처음 보게 된 사람처럼

뷰파인더로 바라보는 세상은 사물 하나하나가 새로웠다.


필름 사진은 그때의 분위기, 빛과 공기를 꾹 눌러 담듯

나의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영화처럼 만들어주었다.


이 카메라를 고쳐서 다시 쓰진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팔거나 버리지는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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