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 맞이방(대합실)에서 평소 들리지 않았던 음악 연주 소리가 들렸다. 첼로, 바이올린, 플루트 등 현악기와 관악기의 합주 소리였다. 지하철역에서 좀처럼 들리지 않았던 소리 때문이었을까. 다들 숨죽인 채로 시선을 고정한 탓인지 소음이 가득했던 역사가 공연장이 되었다.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장애인식개선 캠페인 및 문화공연'
올해 4월 20일이었다. 매년 이날은 장애인의 날이다.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준비한 행사였다. 약 스무 명이 무대로 마련된 공간에서 악기를 연주했고, 나처럼 연주 소리에 이끌린 시민들이 발걸음을 멈춘 채로 음악을 감상했다. 승차장으로 들어가는 개찰구 쪽에는 인식 개선 캠페인을 위한 홍보 부스가 있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각종교구를 안내하기도 하고 점자 명함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간단한 OX 퀴즈를 맞히는 부스도 있었다.
'장애인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장애우'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장애가 있는 사람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다.'
'장애인을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장애인차별금지법이다.'
문화 공연 덕분에 예기치 않은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고, 캠페인 덕분에 한 번 더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된다. 훌륭한 기획이었다. 지하철역이라는 공공공간을 잘 활용한 행사였다.
사람이 죽어도 안 바뀌는 제도가 있다
태엽을 돌려 2023년 4월 20일로 돌아가보자. 그날은 미팅이 있는 장소로 출근하는 길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지하철 4호선(서울)을 이용했다. 휴대폰을 꺼낼 틈이 없을 정도로 지하철 내부는 출근 인파로 가득했다. 그날따라 지하철은 유독 천천히 운행되었다. 방송에서는 전장연 시위 때문에 지하철 운행이 늦어지고 있다는 음성 안내가 나왔다. 결국 약속 시간에 맞춰 가지 못할 것 같아 동대문역에서 내려 1호선으로 갈아탔다. 누구의 말마따나 시위 때문에 평범한 시민이 피해를 입은 걸까.
2001년 오이도역에서 장애인 노부부가 휠체어리프트를 이용하다가 추락하여 한 명은 사망하고 한 명은 크게 다쳤다. 2018년 지체장애 1급 A 씨는 신길역에서 1호선에서 5호선으로 환승을 해야 했다. 호출 버튼을 누르려고 이동하다가 계단으로 떨어져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병원에서 3개월 간 혼수상태로 있다가 결국 사망했다.
전장연 활동가들은 2021년부터 지속적으로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이에 서울교통공사는 전장연이 불법행위로 열차 운행을 방해하고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장애인들에게 3천만 1백 원과 지연손해금을 청구한 바 있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지 않은 책임은 누구에게, 어떻게 요구해야 한단 말인가?
사람이 죽어도 느리게 바뀌는 도시, 되려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도시가 살기 좋은 도시일까? 장애인은 '시민'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이동권 투쟁이 있을 때마다 현장에서든, 온라인에서든 어김없이 나오는 말이 있다. '일반 시민에게 피해 주지 마라'라는 이야기다. 심지어 '테러', '폭력'이라는 단어로 둔갑시키는 경우도 있다. 집회나 시위는 본질상 일반 시민에게 위력을 행사한다. 불편함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과연 우리의 민주주의는 성숙하고 진보하고 있는 것일까.
2023년에 서울교통공사는 시위하는 전장연을 소송했지만 2024년에는 한층 위 대합실을 통째로 문화공연장으로 내어주었다. 지하철역에서 펼쳐지는 도시판 지킬 앤 하이드랄까.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는 온탕과 냉탕을 오간다. 이동권을 외치는 장애인은 시간을 뺏는 테러로 낙인찍지만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을 연주하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사뭇 다르다.
국내 저상버스 도입률은 38.9%, 프랑스와 미국은 배리어 프리가 의무
이동권은 도시민의 기본권과도 같다. 이동을 제한하면 현대 도시민은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영국 사회학자 존 어리(John Urry) 미국 모빌리티 연구자 미미 셸러(Mimi Sheller)는 자동차의 이동성이 자유의 원천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에서는 지하철과 버스는 시민 자유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과거와 달리 도시민의 생활 반경은 넓어졌다. 집, 일자리, 여가활동 장소에 이르는 생활권이 보행으로 가능한 거리 내에 있는 사람은 드물다. 도시민의 생활권이 넓어질 수 있었던 건 교통수단의 발전 때문이다.
대중교통 이용에 제한이 있는 이들이 있다면, 문제를 개선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서울시에도 거의 모든 지하철에 승강기가 설치되었다. 반면 버스는 어떨까. 저상버스는 버스 출입구에 계단이 없고 경사판이 설치되어 휠체어나 유아차가 오르기 쉬운 구조의 버스다.
국내 저상버스 도입률은 2023년 기준 저상버스 도입률은 38.9%다. 저상버스 도입률이 가장 높은 서울시도 66.7%에 그친다. 이는 시내버스에만 해당한다. 고속버스, 시외버스, 마을버스의 저상버스 도입률은 제로에 가깝다.
반면 프랑스 노선버스 중 저상버스의 보급율은 100%에 가깝다. 프랑스뿐만이 아니다. 2017년 기준 영국 또한 저상버스 보급율은 99%까지 확대되었다. 미국은 1990년 저상버스 도입을 의무화했다.
국내 대중교통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 '특별교통수단'이다. 교통약자의 이동을 지원하기 위해 휠체어 탑승설비 등을 장착한 차량이다. 지자체별로 운영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장애인 콜택시, 교통약자 콜택시가 있다. 정부는 2020년 53억 원, 2021년 48억 원, 2022년 94억 원, 2023년 339억 원, 2024년 604억 원 예산을 편성한 바 있다.
예산은 매년 증액되고 있지만 실제 운행률을 변화시키기엔 어렵다고 한다. 특별교통수단의 실제 운행률을 변화시키려면 인건비가 필요한데, 현재 배정된 예산에는 일반적으로 관리비나 유류비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연말이면 예산안이 확정될 것이다. 단시간 내에 지하철과 시내버스 이용 환경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특별교통수단 운영을 위한 예산과 제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지옥철을 타보는 게 소원이에요"
대한민국은 세계 그 어떤 나라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비용 대비 효과가 큰 도시설계 수단을 선택했다. 이 때문에 장애인은 대중교통에서 밀려났다. 책 <노들 바람>에 나오는 이영애 씨의 “지옥철을 타보는 게 소원이에요”라는 말이 오늘날 대중교통의 현실을 그대로 말해준다. 지옥철을 타는 게 소원이라는 말에 마음이 착잡해진다. 우리는 모두가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수나우저 테일러의 책 <짐을 끄는 짐승들>에는 장애인으로 번역한 disabled people에서 수동태인 'disabled'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장애가 어떤 개인이 가진 속성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 특히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도시는 설계와 개발 과정에서 장애적 환경을 만들어낸 것이다. 장애인이 이용하기 힘든 지하철과 버스의 현실은 과거 성장과 속도를 중시했던 대한민국 도시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제라도 반성과 시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의 인식이 변화해야만 살고 있는 도시의 풍경도 변화할 것이다.
"장애인 여러분의 집단 승하차로 인하여 열차가 많이 늦어져서 선량한 시민이 피해 보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버스를 타자’에는 2001년 '장애인과 지하철을 탑시다' 행사 당일 풍경이 그대로 촬영되었다. 지하철 운행이 늦어지자 일부 지하철에 탄 시민들과 장애인과 말다툼이 벌어진다. 전장연 박경석 대표가 지하철역에서 내려 전한 말을 그대로 옮겨본다.
"오다가 시민 여러분들하고 많이 다툼도 있었습니다. 그 다툼이 참, 마음 아프게 느껴집니다. 잠깐의 불편과 잠깐의 지연이 그들에게 그렇게 큰 화나는 일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화나는 일을 우리들은 저질렀습니다. 장애인의 문제는 시혜와 동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보살펴주는 문제도 아닙니다. 당당한 인간의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말하려고 하면 사회는, 정부는, 장애인 문제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은 '불쌍하다' 그러면서 혀는 차고, '불쌍하다' 그러면서 돈 몇 푼은 던져주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정말 자신의 동냥이나 자신의 선한 마음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그렇게 하면서 자기의 이익에, 자기의 이익에 한 시간, 삼십 분 늦으니까 당장 욕하면서, "병신새끼들" 욕합니다. 그래, 우리는 병신입니다. 병신이라도 당당한 병신이길 원합니다. 지금까지 장애인 문제 때문에 침묵하고 정말 받아야 할 차별 다 받으면서 살아왔는데 이젠 그러지 맙시다. 정말 그러지 맙시다. 더 이상 죽을 수 없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하라!"
약 10년이 흘러 2010년이 되었다. 책 <노들바람>에 중증 장애인 이영애 씨의 일기가 실렸다. 2010년 4월 20일 일기에는 그날의 풍경이 담겼다.
'경찰들은 우리가 횡단보도를 점령하고 있어 도로 위의 차들이 주행할 수 없다며,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고 빨리 가라고 했다. 불편? 얼마나? 우리는 365일 24시간 평생을 불편했는데.'
2001년, 2010년 그리고 2024년 국내 교통약자 이동권 현실 그리고 이동권 보장 시위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인식은 얼마나 변화했는가. 나를 포함한 많은 시민들이 장애인의 날 문화공연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우리는 장애인의 연주 소리에는 발걸음을 멈추지만, 지하철 운행을 지체시키는 시위에는 1분 1초도 기다리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장애인 이동권 시계는 왜 이토록 느리게 가는 걸까.
※ 전장연 유튜브에 故박종필 감독의 다큐멘터리 '버스를타자'가 공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