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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ppy Flight Jun 04. 2020

# 승무원과 '볼펜 (2)'

- 볼펜과 시간은 비례한다 - 

6개월 동안 모은, 약 25종의 항공사 볼펜. 100개 이상 모으는 것이 목표다. 


비행기에 실리는 물건을 '기용품'이라고 부른다. '비행기에서 사용하는 물품'이란 의미다. 승무원은 기내에 실리는 물건을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다. 비행기 물품은 회사의 재산임과 동시에 면세품이기 때문이다. 회사 물품을 외부로 유출하는 것은 심하게 얘기하면 '절도'다 (심하게 오버해서 얘기할 때 그렇다는 거니까 승무원 여러분! 화내지 맙시다. 나도 공범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승무원들이 의도치 않게 외부로 가지고 나가는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볼펜'이다. 


볼펜은 회사의 재산이며 면세품임과 동시에 소모품이기도 하다. 소모품의 정의를 네이버에서 검색해 보니 '쓰는 대로 닳거나 줄어들어 없어지거나 못 쓰게 되는 물품. 종이, 볼펜, 연필, 빗자루 따위의 사무용품이나 일상 물품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볼펜은 승객 서비스 용으로 탑재되지만 탑승 승객 수만큼 실리는 건 아니다. 보통 클래스 당 12개 들이 볼펜이 1 다스 실린다. B777 - 300 항공기를 예를 들면, 퍼스트 클래스 1 다스 (12개), 프레스트지 클래스 1 다스 (12개), 이코노미 클래스 2 다스 (24개)로 총 48개의 볼펜이 기내에 실린다. 이 볼펜은 왕복분이다. 


외국으로 나가는 비행기에서 선심 쓰듯 승객들에게 다 나눠줘 버리면 돌아오는 비행 편 승무원들은 기내에서 '볼펜 찾아 삼만리'를 해야 한다. 그래서 서비스하기 전에 미리 다음 비행 편 볼펜을 남겨 놓는다. 


그렇지만 볼펜이 모자를 경우는 거의 없다. 승무원들의 가방에는 적게는 수 개, 많게는 1 다스 이상의 볼펜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승무원이 일부러 기내 볼펜을 자기 가방에 넣는 것은 아니다. 비행을 하다 보면 승객들이 볼펜을 찾는 경우가 종종 있다. 메모를 하기 위해서, 서류를 작성하기 위해서, 아니면 그냥 비행기 탄 걸 기념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승무원들은 항상 유니폼에 두세 개의 볼펜을 꽂고 다닌다. 그 볼펜은 해당 비행기의 볼펜인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이전 비행에서 서비스를 하고 남은 것들이다. 


비행이 끝나면 몇 개의 볼펜이 주머니에 들어있다. 이걸 가방에 넣으면 어느새 수 개, 수십 개로 불어난다. 가끔 가방을 정리하다 보면 '내 가방에 볼펜이 이렇게 많았나?' 놀랄 때도 있다. 너무 많을 경우 동료 승무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동료 승무원에게 나눠 주려고 하면 "저도 볼펜 많아요"하며 거절을 당하기도 한다)


예전에 일본 승무원이 쓴 책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책 제목이 '퍼스트 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였다. 왜 퍼스트 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을까? 퍼스트 클래스를 타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부를 이룩한 사람들이다 (아닌 경우도 있다. 마일리지를 모아 탄다든지, 회사 출장 경비로 탄다든지...) 


책 저자에 따르면 퍼스트 클래스 승객들은 이미 펜을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그 펜으로 비행 중에는 독서를 하고 메모를 하고, 사업에 대해 떠오르는 영감을 적고, 자기 계발에 힘쓴다고 한다. 비행기에서 조차 그러니 성공할 수밖에 없는 거고, 성공하니 퍼스트 클래스를 탄다는 얘기인데, 문득 진짜 그런지 다음에 비행을 가면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승무원이 되고 나서 볼펜을 산 기억이 거의 없다. 항상 내 곁에는 회사 볼펜이 있다. 안방 서랍 안에도, 거실 식탁 위에도, 그리고 내 방 노트북 옆에도 회사 로고가 박힌 볼펜이 있다. 나 역시 그걸로 글을 쓰고 메모를 한다. 요즘은 다른 항공사 승무원을 만나면 볼펜 교환을 제안한다. "우리 회사 볼펜 줄 테니 너희 회사 볼펜 좀 달라"고...


지난주 런던에서 돌아올 때 공항에서 영국 항공 (British Air) 승무원이 없나 두리번거렸으나 보질 못했다. 다른 항공사 승무원들이라도 봤으면 볼펜 교환을 부탁했을 텐데. 마침 지상에서 인천으로 돌아가는 우리 항공기 연료 보급을 위해 네덜란드 항공 (KLM) 정비사가 탔다. 그에게 볼펜 교환을 요청했더니 사무실에 가서 가져오겠다며 잠깐 기다리라고 한다. 


그 옆에서 내 얘기를 듣고 있던 기내식 직원이 "볼펜이라면 나도 많지"하며 가방을 뒤져 '에어로 멕시코'와 '에바 항공' 볼펜을 준다. 또 그 옆의 옆에 있던 화물 서류 담당 직원이 "나도 줄게"하면서 '오스트리안' 항공사 볼펜을 내게 줬다. 사무실에 다녀온 KLM 정비사가 준 볼펜을 포함해 그날 '영국 항공' 볼펜은 구하지 못했지만 각기 다른  다섯 종류의 항공사 볼펜을 구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약 25개 항공사의 볼펜을 모았다. 과연 세계에 몇 개의 항공사가 있을까? 좁은 땅덩어리의 우리나라에도 현재 8개의 항공사가 운항하고 있으니 전 세계에는 아마도 1000개 이상의 항공사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그 모든 항공사의 볼펜을 하나 이상 모으는 게 내 목표다. 볼펜이 많아질 수 록 내 비행시간도 늘어날 것이고 비행기에서 하기해야 할 시간은 가까워질 것이다. 아무튼 그때까지 모아보자. 최대한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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