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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황작물 Dec 27. 2023

엄마만 보면 허기가 진다

[책 리뷰] 박채영의 '이것도 제 삶입니다'

나는 파블로프의 개다. 엄마만 보면 배가 고프다. 그래서 먹고 또 먹는다. 배가 부르지만 음식은 끝없이 들어간다. 포만감과 허기가 동시에 몰려올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끊임없이 음식을 내주던 엄마도 걱정스러운 눈길로 묻는다. 

"너 위 안 아프냐? 그렇게 먹어도 괜찮아?"


그녀는 어린 나에게도 묻곤 했다. "넌 내가 밥으로 보이냐?" 하지만 퉁은 잠시뿐. 나의 욕구에 대체로 무관심했던 엄마는 배가 고프다는 말만큼은 무시하지 않았다. 엄마는 언제든 서둘러 음식을 내주었다. 급한 마음에 설익은 밥을 주기도 했지만 나는 맛있게 먹었다. 그녀가 주는 것이라면 뭐든지. 


엄마의 엄격한 밥상머리 교육 때문에 편식을 할 수 없었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하지만 언니의 뚜렷한 기호와 일관되게 골라내는 음식들 앞에서 나는 멈칫하게 된다. 어쩌면 엄마의 교육은 평범했을지도 모른다. 영양소와 건강에 대해 설명하고 때로는 구슬리고 때로는 화도 냈겠지만 그뿐이었을지도.


그것을 깊이 받아들인 것은 나였을 것이다. 그녀를 유난히 무서워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사랑받고 싶었다. 보세요, 나는 당신이 주는 것을 거부하지 않아요, 나를 사랑해 줘요, 쓰다듬어 주고 착하다 말해요. 


그 버릇은 여전히 내게 뿌리 깊이 남아 있다. 육식을 지양한 지 여러 해가 지나 이제 나는 동물을 먹고 싶은 욕구를 거의 느끼지 않는다. '식욕'을 말하자면 분명 그러하다. 그럼에도 누군가 내어주는 음식 앞에서, 누군가의 제안 앞에서 망설이고 만다. 내가 먹고자 결정한 것을, 내 몸이 원하는 만큼만 먹는 그 간단한 일이, 내겐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이것도 제 삶입니다> 책표지 @오월의봄


음식과 건강한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다는 자각 때문일까. 섭식장애에 마음이 쓰인다. <이것도 제 삶입니다>의 부제는 '섭식장애와 함께한 15년'.


누군가 이 책을 '섭식장애 환자와 그 부모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했을 때, 나는 애증으로 터질 것 같은 모녀 관계를 짐작했다. 섭식장애 환자는 주로 여자이며 딸이 애증을 갖는 것은 대체로 어머니이니까. 아버지는 늘 부재중 아니던가. 어떤 형태든지 간에. 


내 예상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주로 어머니와의 관계를 다루지만 이들은 뜨겁게 사랑한다. 애증이 없을 수 있겠느냐마는 증보다 애다. 서로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그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다. 내가 나의 엄마의 사랑을 믿을 수 없어서, 관념적으로만 이해하는 데 지쳐서 증거를 원했던 것과는 다르다. 정신이 얼얼하고 부끄럽기까지 하다. 


이들은 서로를 더 보살피고 싶어서, 더 행복하게 하고 싶어서 고통을 안긴 것으로 보인다. 어떤 것이 더 힘들고 덜 힘든 것이 아니라 고통의 형태가 다양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겠다는 만용을 접고 각자의 고통을 안은 채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십 대 때부터 음식을 거부했다고 한다. 스스로를 통제하고 그 통제력을 타인에게 증명하길 원했다. 여기에, 여성의 외모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이 가세한다. 그녀는 거식증을 진단받아 입원하면서 오히려 더 음식과 타인의 시선에 집착하게 된다. 식사가 전쟁이 되고 거식증은 곧 폭식증으로 이어진다.


책은 섭식장애 치료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가부장제 사회를 견뎌내며 살아온 여성들의 삶을 담아 의미 있게 다가온다. 홀로 딸을 키우며 이 사회의 폭력성을 고스란히 겪어낸 엄마의 불안은 딸에게도 전해졌다. 저자의 할머니 역시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를 동시에 겪어낸 당사자다. 


그러나 여성들은 혹독한 가부장제 사회에서도 서로의 어깨에 기대며 살아왔다. 저자가 이모들과 언니들 곁에서 성장해 왔듯이. 


해피엔딩을 기대한다면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 책은 질병 극복기가 아니다. 저자는 여전히 폭식하고 구토한다고. 그러나 정상의 기준을 따라기기 위해 허덕이지 않고 치료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몸에서 소외되지 않으며 '병과 조화를 이룬 삶'을 살겠다고 말한다. 병이 나은 뒤로 삶을 유예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그 선택을 힘주어 응원해 본다. 


섭식장애가 날씬해지고 싶은 여자들의 욕심이 부른 병이라고 오해하는 이가 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또한 스스로의 먹는 행위를 돌아보고자 할 때도 이 책은 적절한 선택이 될 듯하다. 나 역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음식과 더 산뜻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리라 다짐하게 됐다. 


좋은 책을 만나 반가운 마음으로, 더 많은 질병서사가 나오길 바라본다. 누구도 영원히 건강할 수는 없으며 어떤 병에는 사회적인 맥락이 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개인의 삶으로 사회를 들여다보고 인간과 질병을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들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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