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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황작물 Mar 07. 2024

그저 재수가 없을 때도 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만난 그 사람, 이제는 잊어야지

우즈베키스탄에서 나의 활동 반경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았지만 박물관은커녕 극장도 없었다. 있다 해도 언어가 통하지 않아 자주 가진 못했겠지만 아예 없으니 고민할 것도 없었다.


점점 내 활동 영역은 시장과 집, 남편과 함께 가는 몇몇 식당들로 고정되었다. 다행일까. 원래 멀리 나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마당발은 아니어서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있었다. 떨어져 지내던 남편과 매일 함께 웃고 떠들다 잠들 수 있어서 행복했고 불안정하나마 인터넷이 있으니 한국의 친지들과도 연락할 수 있었지만 늘 사람이 그리웠다. 그러니 경계심이 많은 나인데도 우연히 만난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남편을 제외하고 당시 내가 가장 자주 만난 이는 그곳에서 사귄 E와 그녀의 가족들이다. 그야말로 길에서 스쳐 지나가다가 친구가 되었는데 그녀가 고려인이라는 것이 큰 매개가 되었다. 한국말을 못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현지인들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녀는 한국을 모국이라 여겼다. 그녀에 대해서는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그리고 또 자주 만나야 했던 한 명이 있으니, 남편 회사 직원인 L이다. 우즈베키스탄인이지만 한국인과 결혼한 누나를 따라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 한국어에 매우 능통했다. 나는 그에게 남편보다 한국말을 더 잘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모두에게 한국 이름으로 불렸고 편의상 여기서는 영철이라고 부르겠다.


처음 만난 날, 나는 영철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아기띠를 선물했다. 한국에서 아내가 들어온다고 하니 영철이 남편에게 부탁한 것이었는데 대가 없이 건넨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에게 물어 가성비 좋은 것을 찾은 것이지만 당시 물가로 십만 원이 훌쩍 넘었다. 그런 선물을 주고받을 만큼 남편과 친분이 있진 않았지만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의미도 섞여 있었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고마워했다.


@unsplash


말하자면 영철은 현지 코디네이터였다. 한국인 직원들의 비자를 연장하거나 거주등록을 하는 것도 그의 일이었고 내 것도 그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니 남편이 출근한 뒤 나는 그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있을 때와 나와 단 둘이 있을 때가 딴판이었다. 누군가 함께 있으면 그렇게 정중하고 공손할 수 없었지만 둘이 있으면 나를 짐짝 취급했고 어떻게든 내게 모욕을 주려고 안달이 난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 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처음 그와 함께 관공서에 간 날부터 혼란이 시작되었다. 가뜩이나 군복을 입고 있는 사무소 직원들 때문에 위축되어 있던 때, 그는 빈정대며 말했다.

"한국에서 할 일 없어요? 그냥 한국 돌아가요. 왜 여기까지 와서 여러 사람 고생 시켜요?"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면서도 애써 차분하게 답했다.

"저희 지금 막 결혼했잖아요. 이제 부부인데 같이 좀 살아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은 채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나는 그 일을 계속 곱씹으면서도 남편에게 바로 말하지 않았다. 굳이 갑을을 따지고 싶진 않지만 하급 직원인 영철이 굳이 상사의 아내에게 무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감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를 오해한 것이라고 여기기 위해 노력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남편의 상사, 영철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이전에도 그랬듯이 무척 정중했고 나는 그런 영철을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그 덕분에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린 것 같다고, 고맙다고 했다. 그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며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굴었고 나는 이전의 내 느낌이 잘못된 것이라 여기며 안도했다. 


하지만 얼마 뒤 다시 그를 만나게 되었을 때다. 그는 내 인사와 질문을 무시했고 반말을 섞어 말했다. 도움을 받기 위해 내 친구가 된 E도 함께 차에 탔을 때는 엽기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창문을 내리고 지나가는 여자들을 성희롱하며 낄낄거렸다. E는 말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캣콜링이 흔하긴 하지만 상사의 아내가 있는데 이럴 수는 없는 법이라고. 저런 더러운 말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나는 점점 더 내 감정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영철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피할 수 없어 괴로웠다. 불가피한 이사로 인해 또 관공서에 함께 갔던 날, 영철은 계약의 상대로 온 임대인 여성에게도 무례를 범했다. 그는 안전거리를 침범하며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갔고 얼굴을 들이밀며 이죽거리듯 말했다.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태연했다. 내가 현지 문화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고 대화 내용도 알 수 없으니 괜찮은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날은 서류 미비로 계약을 마칠 수 없어서 다음 날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그녀는 제삼자를 통해 우리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영철에게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그 불손한 태도를 사과하지 않는 한 계약할 수 없다고. 


며칠 뒤 다시 만난 영철은 내게 미안해하기는커녕 드러내놓고 짜증과 신경질을 부렸다. 나 때문에 번거롭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나로 인해 일이 늘어났다 해도 이 역시 그의 업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누군가의 호의나 선처가 아닌 회사의 규정에 의거하여 그곳에 갔다. 나는 그 사실을 짚으며 덧붙였다.


"내가 영철 씨 상사는 아니지만 친구나 부하 직원도 아니에요. 안 그래요?"


나는 그를 다시 만날 일이 없기를 바라고 또 바랐지만 그 후에도 몇 번을 더 만나야 했다. 이후 그도, 나도 서로 인사하지 않았고 사소한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일을 처리하다 보면 이 무슨 유치한 일인가 싶었지만 더 이상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가 대체 왜 그랬는지. 나로 인해 그가 맡게 되었던 일이 그토록 견디기 힘들었는지. 그래서 나를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던 것인지. 나중에야 남편도 모든 것을 알고 분노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고 내가 느낀 혼란과 좌절까지는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나라는 존재를 한 번도 떠올려 본 적 없겠지만 나는 종종 그를 떠올린다. 사람을 이해하고 싶은 부질없는 욕심은 그가 뿌리 깊은 여성혐오자가 아니었을까 짐작하게 하는데, 진실은 알 수 없다. 


이 일에서 나는 무엇을 건져 올릴 수 있을까. 내 고약한 습관은 이야기를 훈훈하게 끝내거나 이로 인해 뭔가를 배웠다고 말하고 싶게 만든다. 적어도 내가 반성을 하든가. 하지만 도무지 그럴 수 없는 일도 있음을 깨닫는다. 어떤 일은 그저 재수가 없던 것이다. 잊으면 그만이다. 기어코 나는 하나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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