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외계인으로 여기며 행복하게 살아가기
언니는 줄곧 말하곤 했다. 남들은 여동생이 있다고 하면 쇼핑도 같이 하고, 미용실도 같이 갈 줄 안다고. 그런데 너란 동생, 이게 웬 말이냐고.
나도 그녀와 쇼핑몰이나 미용실을 같이 간 적이 있긴 하지만 그녀가 옳다. 나는 대체로 끝나는 순간만을 기다리며 졸졸 따라다닐 뿐, 즐거운 쇼핑(/미용실) 메이트가 되어주지 못했다. 이 셔츠와 저 셔츠, 뭐가 더 예쁘냐는 말에는 뭐가 다른 거냐고 되묻기 일쑤. 청바지를 산다고 하면 내 입에선 이런 말이 튀어나가고 만다.
"그런 거 열 개도 넘게 있지 않아?"
언니는 늘 어이없어하며 말한다.
"니 눈엔 이게 똑같아 보여?"
미안하다, 그렇다.
그런 언니와 내 남자친구, 셋이서 캐리어 매장에 간 적이 있다. 그녀는 비슷비슷한 캐리어를 한참을 보고 또 봤고 나는 금세 지쳐 버렸다. 혹시 남자친구도 그럴까 싶어 딴엔 농담을 던지며 양해를 구했다.
"미안. 언니는 캐리어도 디자인 보고 고르거든."
그때 남자친구의 동그랗게 커지던 눈. 그는 황당해하며 물었다.
"그럼 캐리어를 뭘 보고 골라? 디자인을 안 보면?"
아뿔싸. 나는 또 한 명의 언니가 생겨 버렸다. 그러고 보니 그도 지치긴커녕 눈에 불을 켜고 캐리어를 보고 있었다. 나에게 캐리어란 짐 나르는 수레일 뿐이고 이들에겐 세상 그 무엇도 패션이 아닌 것이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외계인이다. 언니는 내 남자친구를 두고 잃어버린 동생을 찾았다며 행복해했다.
얼마 후 그는 내 남편이 되었고 처형과 제부 사이가 된 이들은 패션 무식자인 나와 함께 사는 괴로움을 공유하는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언니와 남편은 무턱대고 유행을 좇지 않지만 그렇다고 놓치지도 않는다. 나는 무엇이 유행하든 한결같다. 아직 해지지 않은 것을 집어 입고 가끔은 해져도 입는다. 누군가 버리라고 애원할 때까지.
나도 가끔은 세련미 철철 넘치는 사람들이 부럽다. 모처럼 모임에 나갈 때면 혹시 내가 추레해 보이는 것은 아닐까 신경이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순간뿐. 아무리 패션에 관심을 갖고 싶어도 도무지 되지 않았다. 게다가 환경과 노동에 대한 관심까지 소량 추가되니 패션은 영영 가까이할 수 없는 무엇이 되었다. 내게 옷이란 추위와 햇볕을 막아주는 보호장비이자 나를 문명인으로 보이게 하는 최소한의 도구일 뿐이다.
이러니 화장도 할 리가 있나. 친정 엄마는 이런 나를 안타까워한다. 한창 이쁠 나이에 노랗게 뜬 얼굴로 돌아다니니 속상하다는 거다. 노메이크업도 모자라 몇 년 전부터는 기초화장품까지 쓰지 않아 그녀가 보기엔 복장 터질 노릇이다. 어느 날, 좋은 나이 놓치지 말고 제발 뭐라도 좀 바르라는 성화에 내가 말했다.
"좋은 나이는 무슨. 엄마 딸이 이제 사십 대요, 사십 대!"
그러자 엄마의 답,
"사십 대가 어때서? 나는 그때가 제일 예뻤어! 그때 한참 피더라. 사십 대가 딱 좋은 때라고!"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먹고 있던 밥에나 집중하려는데 옆에 있던 남편이 배시시 웃으며 말한다.
"맞아요, 어머니. 저도 지금이 제일 예쁜 거 같아요."
그날, 엄마는 기어코 내 얼굴에 마사지를 해야겠다고 주장했다. 푸석푸석한 얼굴을 못 봐주겠으니 얼른 누우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화장품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터라 엄마의 정성을 덥석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옆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얼른 누워 장모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저는 마사지 좋아요, 어머니."
그는 옷을 좋아한다. 스마트폰을 가져온다더니 방에서 나오지 않기에 가 보면 뜬금없이 옷을 입어 보고 있다. 그것도 지금 입을 옷이 아니라 몇 계절 뒤에나 입을 옷들을. 쇼핑몰에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최소한의 옷만 입어보는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물론 내가 정상이라고 우길 생각은 없다. 우리의 다름을 실감할 뿐.
남편은 하루도 빠짐없이 체중계 위에 올라간다. 체중을 잘 재지도 않고 재 봐야 이게 찐 건지, 빠진 건지도 잘 모르는 나와는 극명한 차이다. 그는 한동안 열혈 다이어터였고 그 숫자에 따라 일희일비를 반복하기도 했는데 유지어터가 된 뒤부터는 안정감을 찾았다. 곁에서 지켜보는 나도 이제야 안도할 정도.
현재 그는 평생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체중에 도달했다. 어린 시절 한 번 스쳐 지나간 적은 있지만 한번 넘긴 뒤로 다시는 만나본 적 없는 무게다. 한때는 맞는 옷을 찾을 수 없어서 고생한 시절도 있으니, 옷에 대한 애정이 더욱 커지는 것은 내가 봐도 당연한 일이다. 나는 그의 쇼핑을 늘 응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쇼핑몰에서 거친 실랑이를 벌이곤 한다. 이유는 하나. 그가 내게도 옷을 사라고 강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싹 다 버리기 전엔 살 수 없다고 진심을 다해 말한다. 몸은 하나인데 옷만 계속 쌓이는 건 내게 죽기 전에 처리해야 할 업보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굽히지 않았다. 어느 날에는 제발 옷 좀 사 입으라며 앙탈을 부리기까지 했다. 아이처럼 칭얼거린 탓에 뜬금없는 폭소가 튀어나올 뻔했지만 그는 매우 진지했다. 문득 내 행색이 추레해 부끄러운 것일까 생각이 들어 어떤 옷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냐고, 그걸 버리고 새로 사겠다고 제안하자 그가 말했다.
"아니 아니. 그런 거 없어. 그냥 제발 좀 사라. 그래야 나도 또 사지. 어떻게 맨날 내 옷만 사!"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지금 네 옷을 사기 위해 내 옷을 사라고 하는 거냐고. 그는 조금의 망설임이나 부끄러움 없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고, 그러니까 제발 사라고. 이 깜찍함을 어쩌면 좋은가.
사람은 다 다르다. 별 거 아닌 것 같은 입맛조차 똑같은 사람이 없다. 냉면을 좋아해도 비빔과 물로 나뉘고 버섯을 좋아해도 표고인지, 팽이인지 나뉜다. 찐만두냐, 군만두냐에 대한 선호도 사람들을 홍해 가르듯 나누지 않던가. 중요한 것은 합의점을 찾을 수 있는지 여부일 뿐.
나는 패스트패션으로 인한 환경파괴와 개발도상국의 노동착취에 조금은 마음이 쓰인다. 하지만 분명히 인정하건대, 내가 옷 소비를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옷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길을 택했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할 수 있고 스트레스 없이 지속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상을 위한 실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모두에게 동일한 방식을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고 가능하지도 않다. 남편은 내가 감히 흉내 낼 수도 없을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고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 세상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나는 한 치의 의심 없이 확신한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아름다운 공존을 위해 남편을 설득한다.
"남편, 너 입고 싶은 거 다 입어. 하지만 나는 좀 내버려 둬."
제목 배경 사진: Unsplash의Brian McMah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