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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하게 보고 싶은 뼈내장

by 구황작물

사나흘 전부터 오른쪽 눈이 아팠다. 모든 통증을 병원으로 해결해야 한다고(또는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나는 일단은 두고 보는 편인데, 마냥 방치한다기보다는 추세를 두고 본다. 느리게나마 나아지느냐, 심해지느냐.


심해졌다.


안과에 갔다. 검사 결과 별 이상은 없었다. 다만 근시가 있고 양쪽 눈의 시력 차이가 꽤 있는 편이라서 가까운 것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오른쪽 눈에 힘이 많이 들어갈 거라고. (물론 눈 주위의 근육이 아니라 눈을 이루는 조직을 말했는데 뭔지는 까먹었다.) 그럼 피로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단다.


가까이 있는 것이라 하면 (종류를 막론하고) 책과 스마트폰, 노트북 이렇게 셋. 내게 매우 중요한 셋. 노안이 오면 책도 예전처럼 읽을 수 없다는 말에 안 그래도 긴장했는데 나에게도 마침내 그 시기가 온 것인가.


뻔한 결말을 예감하며 묻는다.

"노안이 온 건가요?"


의사 왈, 딱히 그렇지는 않다고. 노안이 올 나이이긴 하나(네, 암요) 통증이 그것과 관련된 것 같지는 않고 별다른 이상 소견은 보이지 않는단다. 좋은 소식인가, 나쁜 소식인가. 나이가 찼음에도(!) 노안이 아니라는 것은 (그래봐야 시간문제지만) 반가운 소식, 통증의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답답한 결론.


아니군. 그는 원인을 말했다. 가까이 있는 것을 오랫동안 들여다봐서 그렇다고. 해결책이 없으니 내가 무시하고 싶은 것일 뿐. 이렇게 내 속을 들여다보고.


이왕 온 김에 시력검사를 했다. 안경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시골 가서 술 먹고 취해 밭에 떨군 뒤 일주일 뒤에 찾아서 넝마가 된 녀석이다. 안경테만 삼십만 원이 넘는 것으로 내 생애 가장 비싸게 맞춘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통탄할 일이지만 십수 년을 썼다는 것을 고려하면 바꿀 때가 이미 지났다. 안경잡이가 여러 안경을 돌려쓴 것도 아니고 한 개의 안경을 십수 년이나 쓰다니, 이 정도면 선방이다. 취한 자는 언제나 혀가 길다.


다른 하나는 그 안경을 찾지 못한 일주일간 맞춘 것으로, 안경사님께서 이제 노안이 올 나이이니 도수를 높게 하면 가까이 있는 것을 보기 어려울 거라고 하여 기존의 도수보다 낮게 맞춘 것이다. 나는 별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매우 부드러운 어조로, 그러나 매우 강력하게 권고하여 어쩔 수 없었다.


결과는 꽝. 새로 맞춘 안경은 집안에서는 그럭저럭 쓸 만했지만 도무지 운전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맞춰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기존의 안경을 찾았다. 밭에서 땡볕과 흙과 온갖 생명체들에게 시달려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처음 봤을 때는 충격이었다. 이럴 바엔 안 찾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이날 이때껏 쓰는 것은 그 안경 되시겠다. 지금 이 순간도. 반려인은 새 안경을 맞추라고 닦달을 했지만 이것만큼 익숙하고 편한 것도 없었고 또 이렇게까지 튼튼하다는 데 묘한 감동을 받기도 했다. 십 년 넘게 쓰고 잃어버렸다 다시 찾았으니 이쯤 되면 반려 안경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몰골이 흉한 건 사실. 테도 칠이 다 벗겨졌지만 알도 무수한 실금으로 엉망진창이다. 그렇다고 도수 안 맞는 안경을 쓸 수는 없으니 흉물이 된 안경에 알만 바꾸려고 했다. 어차피 이걸 바꾸나, 저걸 바꾸나, 바꾸긴 해야 하는 상황. 그래서 시력검사를 한 것이다.


eye-test-1313976_1280.jpg?type=w773 @pixabay


누구나 졸지에 못난이로 만들어버리는 동글동글 검안용 안경을 낀 채,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주위를 걸어 다녔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도수를 더 높일 수는 없을까요? 저기 뼈내장이란 글씨가 보이긴 하지만 선명하지가 않아요. 더 선명하게 보고 싶어요."


간호사는 "그럼 어지러우실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옳았다. 알을 바꿔 끼우자 어지러웠다. 다시 처음의 도수대로 처방받았다. 그런데 말이지. 나는 보고 말았다! 어지러울 거란 말을 하는 그녀의 입에 걸린 약간의 웃음! 찰나의 순간 분명 우상향한 입꼬리! 매우 빠르게 자취를 감춰버렸지만 나는 보았단 말이다!


뭐지? 검안용 안경을 낀 내 모습이 웃겨도 너무 웃겼나. 도수를 높이고 싶다는 요청이 지나친 걸까. 혹시, 내 얼굴에 코딱지라도???


진료비를 계산할 때야 알았다. 안과에 뼈내장이란 글씨가 웬 말인가. 백내장이다.


아 나 이런 바보를 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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