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4개월간 직속 상사 없이 일을 했다. 나의 예전 매니저가 이직을 한 이후로 4개월간 나의 "임시 매니저"는 디자이너가 아닌 평범한 비즈니스맨이었다. 깍듯한 예의를 갖추고 정치와 화술에 능한 전형적인 영국 젠틀맨인 그의 밑에서, 나는 아무런 디자인 서포트 없이 4개월을 근무했다. 연차도 별로 오래되지 않았는데 슬슬 스며드는 사내 정치와 온갖 전략과 Stakeholder management에 지치던 차에, 손꼽아 기다리던 새로운 매니저가 드디어 우리 팀에 왔다.
누구나 알만한 세계적인 대기업을 다니다 우리 팀에 합류한 그녀는, 처음부터 내게 굉장히 좋은 인상을 주었다. 활달하고, 재치 있으며 에너지가 넘쳤다. 그렇게 좋은 스타트를 끊고 새 디자이너와 일을 한지 일주일이 채 넘었을 때. 나를 굉장히 짜증 나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내가 주도하는 미팅에서, 그녀가 계속해서 나의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나)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이 디자인은..." "(매니저) 이 디자인은 레이아웃을 아예 다르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 이건 우리 디자인 시스템에 있는 컴포넌트.." "(매니저) 근데 이 컴포넌트는 이름이 왜 이렇게 되어있어?"
"(나) 다음으로 내가 제안하고 싶은.." "(매니저) 음 근데 이건 이런 방식으로 해보는 게 낫지 않아?"
영국의 비즈니스 문화는 한국보다 훨씬 더 격렬하고 활발한 토론을 한다. 계급과 직무에 상관없이 일방향이 아닌, 발화자와 듣는 이가 자유롭게 소통하며 의견을 교환하고 질의응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국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그녀는 심해도 정도가 너무 심했다. 내가 말하는 한 문장 문장마다 나의 말을 끊었다. 이건 거의 내 말을 끝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아..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녀가 말을 끊는 포인트는 어차피 내가 말하려고 했던 것일 때도 있고, 전혀 상관없는 제2의 주제일 때도 있고, 새로운 아이디어일 때도 있고, 부가적 정보나 이해를 위한 질문일 때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 말에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드니 내가 어디까지 말을 했는지 계속해서 잊어버리고, 주장과 이어서 근거를 말하기도 전에 근거를 말할 기회를 계속해서 놓치게 되었다. 무엇보다, 짜증이 났다. 왜 내 말을 기다려주지 않는 거야? 존중을 받지 못한다고 느꼈다.
"(나) 원래 이렇게 말을 끊는 게 영국 문화인 거야?"
잔뜩 화가 난 나는 같은 팀 영국인 동료에게 통화를 걸었다. 물론, 영국에서 사람들이 한국보다 내 말에 끼어드는 빈도가 높다고는 느꼈지만 정말로, 영국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서 기분 나쁘다고 생각 안 하나? 궁금해졌다.
"(나) 여기서는 말을 끊는 거 자체를 사람들이 무례하다고 생각 안 해?"
"(동료) 어느 정도는 용인되지만 너무 자주 하면 무례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해. 그런데 무슨 일이야? 무슨 문제 있어?"
눈치가 빠른 내 동료는 내가 단순히 문화에 대한 질문을 물어보려는 것이 아님을 단번에 알아챘다. 그동안 새 매니저와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새 매니저가 말을 끊는 습관이 나한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미팅에 참여한 다른 동료들한테도 그랬음을 이야기했다. 아. 일한 지 아직 일주일밖에 안됐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마음에 안 들고 짜증 나는 일이 생기다니. 이직을 해야 하나? 나랑 너무 안 맞는 사람인 것 같아. 일주일 만에 문제가 생기다니. 사회생활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한 번도 직장에서 누군가와 이런 큰 트러블이 난 적이 없었던 나였다.
"(동료) 음... 내가 아직 너의 매니저를 잘 알지 못해서 어떤 판단을 내리기는 너무 이르지만, 너의 매니저가 들어온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잖아.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 사람 입장에서는 아직 무서울 수도 있고 긴장해서 그런 걸 수도 있는데. 혹시 너의 매니저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하길 원하는지 물어보는 건 어때?"
"혹시 지금 시간 어때요?"
동료의 말을 듣고 나는 새 매니저와 솔직한 일대일 대화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반신반의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워낙 그녀의 첫인상이 좋았던 터라, 동료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매니저 그것도 내 상사에게, 그것도 유명한 회사를 다니다 온 똑똑해 보이는 그녀에게 일주일 만에 피드백을 주다니, 그것도 부정적인 내용으로. 마음이 참 떨리고 불편했다. 하지만 어떻게 말을 잘 전달할지 머릿속에 예상 시나리오를 한번 그리고 솔직하게 - 하지만 무례하지 않게 살피면서 그녀에게 내가 겪었던 이야기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그녀에게 말한 내용은 대충 이렇다.
내가 영국에서 벌써 N 년을 살긴 했지만 나는 사람들이 서로의 말을 웬만하면 끊지 않는 문화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에 와서 토론이 활발하고 말을 빠르게 주고받는 영국 비즈니스 문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아직도 계속 배우는 중이다. 그러나 내가 최근에 당신과 한 몇 번의 미팅에서, 내 말을 이어나가기가 굉장히 힘들다고 느꼈고, 끼어들기의 정도가 평소보다 더 심하다고 느꼈다. 혹시 원래 선호하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따로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아니면 중간에 내 말을 중단하는 이유가 내 말 자체가 명확하지 않거나,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질문을 하고 끼어들기를 하는 것인지?
그러자 그녀의 반응은 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너무나 당황하면서 몇 번이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당황했다. 나의 상사일 뿐인 그녀가.. 이렇게 계속해서 미안하다며 사과를 한다니? 그녀는 내가 말을 하기 전까지 자신이 모든 사람들의 말을 끊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나 말고 다른 동료도 당했기에 그것이 너무 명백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면서 나와 이렇게 일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 혼자 괴로워하지 않고 재빨리 진심 어린 피드백을 직접 줘서 너무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앞으로 말을 유의하겠다는 약속까지 주었다. (내가 그것까지는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그녀가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 이후로 더 진행된 대화를 통해 나는 그녀가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느라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모르는 것 투성이인 상태에서 뭐라도 더 하나 알고 싶어서 질문 폭탄을 하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계속해서 아이디어를 내려고 하고. 그녀는 사실 나를 도와주고 싶었던 것뿐인데, 마음이 너무 앞서서 오히려 반대로 타인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의도적이지 않은 방해 아닌 방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마음을 알게 된 나는 그녀에게 솔직하게 내가 느낀 바를 이야기했다. 가족 없이 외국에 혼자 와서 일을 해본 내가, 새로운 문화, 새로운 회사, 환경에 대한 두려움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내가 지금 있는 회사는 굉장한 끈기와 여유를 가지고 내가 내 실력을 편안히 발휘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우리 회사는 계속해서 사람을 평가하고 재며 비교하는 회사가 아니라 적응을 할 때까지 천천히 기다려주고 이해해주는 회사다. 내가 그런 사랑을 이 회사에서 받았고 그렇기에 이만큼이나 성장할 수 있었으니 나도 그 사랑을 그녀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저는 직속 상사가 없는 동안 일이 너무 힘들고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당신이 왔다는 사실 자체가 큰 힘이고 도움이 돼요. 그렇기 때문에 혹시라도 우리에게 너무 잘 보이려고 한다거나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하셔도 돼요. 나는 당신이 있는 것 자체가 기뻐요."
이 대화 이 후로 우리의 사이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우리는 매일같이 수다를 떨고 아무 의미 없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낄낄거리기도 하며 친구같이 지내지만 디자인 리뷰를 할 때는 솔직하고 또 비판적으로 서로를 평가해 준다. 하지만 이 것은 모두가 서로에 대한 Trust - 신뢰와 처음부터 천천히 쌓아온 친밀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다양한 나라/문화의 팀원들과 일하는 것은 듣기에는 굉장히 멋진 일 같지만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각자 서로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이 다르고 이해하는 생각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때 명심해야 할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이 사람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되며, 나에게는 기분 나쁜 것이 그 사람에게는 기분 나쁘지 않은 일일 수도 있고, 실은 반대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 머릿속으로 단정하기 전에 그 생각을 직접 대화해서 확인 해보는 것, 말로만 오픈마인드 오픈마인드 하지 말고 직접, 내가 생각한 것과 그 사람이 생각한 것이 일치되는지 대화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아무리 내 문화권에는 당연해 보이는 생각일지라도!
하나 고백하자면 내가 그녀에게 넘겨짚은 면도 있다. 유명한 회사를 다니다 왔고 경험도 나보다 많은 그녀이기에 나는 그녀가 새 회사에서의 압박과 긴장감을 느낄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겉으로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농담도 하고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차가 높든 적든, 유명한 학교/회사를 나왔든 아니든, 외국인이든 영국인이든,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불신과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겉으로 많이 표현되거나 표현되지 않거나의 차이일 뿐. 그것을 잘 다루고 이끄는 방법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 뿐이지 아예 항상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한 사람은 없구나. 완벽한 사람은 역시 없구나. 원래 알고 있었지만 다시 또 이렇게 확인하게 된다.
완벽한 회사, 완벽한 나라, 완벽한 연인, 완벽한 사람도 없다. 해외 생활을 하면서 겪는 진리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유명한 회사를 가고 싶어서 애썼을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런 사회에서 선망하는 회사나 외모, 이성 등등에 대한 판타지 자체가 적다. 완벽한 무언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내게 실망감보다는 오히려 안심과 안정감을 준다. 나도 완벽하지 않잖아? 모두가 완벽하지 않은데 서로 또 사랑하고 사랑받고 살아가니까. 그 말인 즉슨 사랑받기 위해 완벽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