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고 따지고 물어뜯고 장장 9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쳐 이직에 성공했다. 새 회사로 옮긴 지 벌써 6개월, 런던에서 벌써 3번째 회사인 이곳에서, 매니저에게 개선점이 하나도 없다는 최고의 피드백까지 받으며 수습기간(probation)과 연말 평가 (end of year review)까지 가뿐히 통과했다.
내가 이직한 곳은 영국의 시장 점유율, 브랜드 인지도 면에서 1위인 배달 앱, 즉 소프트웨어가 중심인 테크회사이다. 영국 말고도 유럽, 북미, 호주 및 뉴질랜드까지 10개국이 넘는 시장에 진출해 있는 다국적 대기업이다. 어떻게 보면 한국의 배달의 민족보다 몸집이 더 큰 버전이라 할 수 있는데, 한국에 있을 때 배달의 민족의 문화가 좋아서 취업을 하고 싶었던 대학시절을 생각해 보니 사람의 꿈은 꼭 내가 원하지 않는 시기라도 추후에 다른 방향으로 이뤄지기도 하는 것 같다.
런던 생활 4년간 여기 회사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다. 투자회사, 은행에서 근무할 때는 워낙 어려운 경제, 투자용어들을 배우며 백인 영국인들로만 가득 찬 환경에서 허우적 대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러나 현 회사에서는 적응이 훨씬 빠르고 쉬웠다. 영어와 영국 문화가 더 익숙해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런던에서의 벌써 3번째 회사 경험이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회사에 들어간 첫날부터, 물 만난 물고기가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 또는 어릴 적 유학이나 어학연수 경험이 아닌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는
외국인들끼리 영어 하기 < 영어 원어민과 1:1로 영어 하기 < 영어 원어민들 다수와 영어 하기
순서대로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영어 원어민과 대화를 하면 대화 속도도 정말 빠르고 자신들만이 아는 속어 (슬랭)들도 의식하지 못한 채 섞여 쓰기 때문에, 그리고 나 혼자 못 알아듣는 상황에서 질문을 하려고 해도 벌써 자기들끼리 알아듣고 이미 다른 주제로 빠르게 넘어가는 상황이 많다.
테크회사로 이직하고 나니
1. 훨씬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C-레벨, director 레벨조차)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환경
2. 영국문화가 지배적인 환경에서 나 혼자만 끼워 맞추는 환경이 아니라 다양한 국적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교류하는 환경
이 두 가지 점에서 그 어떤 회사보다 빠르게 적응했으며 내가 '외국인' 즉 아웃사이더라는 소외감이 덜했다.
물론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영어로 소통할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의사소통 문제가 있지만, 같은 원어민들끼리도 의사소통 오해는 발생하니 그리 크게 문제 되는 점이라고 느껴지는 않는다.
또한 워낙 다국적 대기업이니 한국인 동료들과 벌써 작은 커뮤니티도 형성했는데, 꼭 같은 팀이 아니더라도 회사 메신저에서 가끔 한국어로 대화를 하거나 한국인들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사소한 재미다.
지난 4년간 영국회사에서 일하면서 동양인이 거의 없는, 백인 영국인으로만 이루어진 환경에 있다가 이곳에 오니 참 그전에 내가 있었던 환경이 너무 척박하지 않았나 싶다. 내가 가진 문화적 특성을 이해받지 못할 때가 많았고, 영국인처럼 말하고 영국인처럼 행동해야만 받아들여진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물론 그 덕에 지금은 영어를 스스럼없이 잘하고 영국문화를 찰떡같이 알아듣게 되었지만, 그동안 고생한 나에게 스스로에게 수고했다고 등을 두드려주고 싶을 지경이다. 왜냐면, 다른 건 틀린 것이 아니니까!
테크회사 = 너드가 많다는 공식이 있지만 테크회사를 다녀본 적이 없는 나는 그건 선입견일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나, 테크회사는 너드가 많다. 시니어 주니어 할 것 없이 내향인들이 더 많고 어느 하나에 빠져 열중하거나 무언가를 배우는 것을 즐겨하는 너드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너드들이 다수인 환경이고 어느 누구 하나 그것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에 더 다양성이 존중되는 문화이다.
회사 사내 슬랙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게이/레즈비언 커플이 대리모 출산을 통해 낳은 아이들을 공유하고, 다른 인종 간의 연애나 결혼도 다른 회사에 비해 훨씬 흔히 이루어지며 혼혈, 흑인, 동양인과 같은 소수자 비율도 높다.
지난 회사는 아무래도 금융계라 그런지 남자도 잘생기고 멀끔한 사람이 많고 여자들도 예쁘고 옷 잘 입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금발의 popular 아이들이 모인 Mean girls culture 느낌이었달까...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쿨하고 소셜스킬도 엄청 좋아야 하는..) 그런 이들이 지금 현 회사에서는 없다.
지난 회사는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고 기싸움하는,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문화 때문에 힘들었다면 지금 회사에서는 소셜스킬이 좀 부족한 이들이 말, 감정표현을 잘 못 할 때 기분 나쁜 일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후자가 훨씬 더 편하다. 왜냐. 너드들은 원래 소셜스킬이 좀 부족할 가능성이 높고 나도 후천적으로 그걸 개발시킨 케이스이기 때문에 이해가 훨씬 더 쉽다. 그리고 전자는 단기적으로 해결가능한 문제인건지? 모르겠다.
테크회사는 프로덕트가 중심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프로덕트를 시각화시키는 디자인팀의 역할이 더 중요하고 임팩트도 클 수밖에 없다.
내가 면접 때 꼭 물어보는 질문이 하나 있다.
"회사의 조직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디자인팀은 어디에 위치해 있나요?"
이때, 마케팅팀 안에 디자인팀이 있다고 하면 나는 그 회사는 절대 가지 않는다. 물론 이것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고 회사 바이 회사지만, 내 경험상 마케팅 안에 디자인이 있는 회사는 디자인을 단순히 '그래픽 디자인' 즉 시각화만 해주는 팀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마케팅이 기획을 하면 비주얼 디자이너가 시각화만 해주는 프로세스이기 때문)
하지만 디자인이 단순히 보이는 것이 아니라, 프로덕 디자인 (UX, UI) 즉 PM과 함께 프로젝트 초기에 문제점이 무언지 탐험하고, Success metric을 의논하며 사용자 경험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협력자(facilitator)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둘째 쳐도 이들이 시니어 리더십에 있다면 정말 큰 문제다. 조직도가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는 건 시니어 리더십 레벨에서 프로덕 디자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회사에서도 그 질문을 물어봤고 Product & tech 부서 안에 디자인 팀이 조직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디자인 팀 사이즈만 해도 전체를 합하면 거의 100여 명에 달한다. 디자인 팀이 그 회사 내에서 얼마나 영향력을 미치는가를 볼 수 있는 또 다른 지표 중에 하나는 회사 전체 미팅 (All hands)에서 Q1 Q2 등의 로드맵과 우선순위 (Priorities) 들을 발표할 때인데, 지금 회사에서 굉장히 많은 디자인 프로젝트들이 우선순위에 랭크돼있고 또 디자인팀 리더들이 프로덕팀 리더들과 함께 로드맵 미팅에 참여하는 걸 보고 지난 회사보다 훨씬 디자인팀의 역량이 크구나를 깨달았다.
금융계에 있다가 테크회사에 오니 어떻게 보면 문화가 다른 것도, 디자인팀의 중요도가 다른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닐까 싶지만 나는 이 회사에 오기 전까지 영국회사가 다 거기서 거기인 줄 알았다. 아웃사이더로서 소속되지 않는 느낌, 제 2 외국어로 영어를 쓰는 고충 이런 것들이 영국에 살아서 그런 거라 생각했지 회사를 옮기면 어느 정도 완화되거나 해소되는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회사도 문제가 있다. 일이 훨씬 더 많고 바쁘며, 사람과의 문제, 의사소통 간의 문제는 항상 발생한다. 그러나 지금 회사는 내가 해결 가능하고 감수할 수 있는 문제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매번 바뀌는 테크회사들의 사정상 지금 내 마음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회사에 지낸 지난 6개월간은 내게 꼭 맞는 회사라는 느낌이 들었고, 회사를 잘 선택했다는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