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좋은 매니저도 있고 나쁜 매니저도 있다. 운이 좋아 좋은 매니저를 만난다면 사실 리포트 입장에서는 딱히 뭘 하지 않아도 된다. 좋은 매니저가 다 알아서 해주기 때문이다. 나쁜 매니저를 만난다면 (경험이 짧은 주니어라면 이를 알아차리는데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지만 결국 본인이 본능적으로 느끼거나 본인 주변 사람들이 안다.) 내가 떠나거나 그 매니저가 떠나기까지 '존버' 하는 수밖에. (보통은 내가 떠나는 게 더 빠르다.) 그런데 이 스펙트럼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진 매니저들도 꽤 많다. 좋은 매니저를 만나는 게 베스트이지만 결국 그것도 운이기에. '그저 그런' 또는 '애매한' 매니저를 만난다면 어떻게 이 매니저를 내게 '좋은' 매니저로 만들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매니저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만, 그 매니저가 나쁜 매니저가 아니라면, 이 매니저를 어떻게 내 커리어에 유익하게 만들 것이냐는 내 능력이다.
커리어 성장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1. 내가 일을 잘해서 보이는 성과. 2. 그리고 그 성과를 알아주는 사람. 내 가능성을 알아주고 이를 이끌어주는 매니저를 만난다면 로켓성장을 할 수 있지만, 이를 저해하는 매니저를 만난다면 내가 아무리 일을 잘해도 성장을 할 수가 없다. 저해하는 매니저를 만난다면 빨리 그 팀이나 회사를 바꾸고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겠으나, 문제는 그냥 손 놓고 있는 매니저들도 있다. 어떻게 이 사람을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존재로 만들 것인가? 과거 시행착오로 인해 쌓은 나만의 경험을 여기에 공유해보려고 한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친구처럼 편하게 대해줘!"
많은 이들이 서양문화권은 매니저를 친구처럼 대할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사실 그럴 거라 판단하고 런던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실제로 영국이 한국보다는 격식을 덜 차리긴 하나 그렇다고 진짜로 매니저를 친구처럼 대하면 곤란하다. 영국에서 내가 만난 매니저들은 하나같이 저런 말들을 하곤 했다. 근데 이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큰일 난다. 나는 이걸 정말 말 그대로 받아들였다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적이 많다. 예를 들면.
- 매니저가 "how are you?" "라고 물을 때 절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줄줄이 늘어놓지 않기.
이 질문은 그냥 한국에서 밥 먹었냐는 말처럼 형식적인 것이다. 밥을 먹었냐고 물어봤을 때 진짜 먹었냐 안 먹었냐 여부는 중요하지 않듯, 이것도 그냥 인사말이라서 지금 내가 어떤 기분을 느끼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빨리 Good 또는 very well이라고 대답하고 일 업데이트로 넘어간다. 매니저가 how are you, how is it going?이라고 물어보는 것은 정말 내 감정이 궁금한 게 아니라 내 일 진행 상황을 알고 싶은데 (그 사람도 결국 자신의 상사에게 업데이트를 해줘야 하니까) 진행상황을 알려달라 대놓고 물어보기엔 너무 딱딱해 보이고 자기도 매니저로서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으니까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다. 이런 성향은 특히 예의가 중시되는 영국에서 도드라지는 것 같고 상대적으로 독일인이나 네덜란드인들은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때문에 이런 오해는 적은 것 같다.
- 매니저가 개인 전화번호 공유해서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해도 절대 연락하지 않기
나는 정말 곧이곧대로 이 말을 받아들여서 연락을 했다가 매니저가 휴가기간이니 돌아와서 답하겠다는 황당한 상황을 겪었다. 아니, 휴가기간 상관없이 언제든지 연락하라며! 이 사람이 좋은 매니저라면 솔직하게 자신의 바운더리를 얘기해 줄 것이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려면 오후 5시에는 나가야 하니 그전에만 미팅을 잡아 달라.'라는 식으로. 왜 굳이 진심이 아닌 말을 해서 쓸데없는 오해상황을 만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걸 매니저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 위의 how are you 질문처럼 - 언제든지 연락 가능한,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냥 하는 말이다.
- 매니저에게 항상 긍정적인 모습,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일관되고 의연한 태도를 보인다.
나는 우리 회사에서 디렉터 레벨들이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걸 보면서 많은 걸 느꼈다. 항상 긍정적이고 밝은 톤으로 프리젠테이션을 시작한다. 팀이 이루어낸 성취와 성과를 강조하고, 개선점은 나중에 마지막에 의연한 모습으로 발표한다. 이 사람들이 바보라서 항상 긍정적인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 일은 대부분 잘 안 돌아갈 때가 많고 스트레스가 많다는 거 안다. 그러나 자신이 불평불만을 하면 그것이 어떻게 팀에 영향을 미치고 자신의 브랜드를 만드는지 아는 것이다.
팀에서 레트로를 하더라도 매번 불평불만만 늘어놓고 솔루션을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항상 웃으면서 긍정적인 면을 이야기하는 친구가 있다. 당신이 팀의 매니저나 리더라면 이런 불만상황들을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근데 문제는 회사의 많은 문제들이 매니저 혼자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누가 예뻐 보이겠는가?
나는 회사에 나타는 병적인 징후들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파악해서 - 이런 점들이 문제다 -라고 매니저에게 요약전달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직원으로서의 나의 역할 (회사를 더 좋게 만들고 싶으니까) 그리고 내가 얼마나 회사를 아끼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대 아니었다. 보통 이런 문제들은 나보다 오래 일한 매니저가 더 잘 안다. 그런데 매니저 입장에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의 문제가 아니야."라고 말하기도 체면이 있지 좀 껄끄럽다 - 아무래도 자기가 상사인데! 그래서 결국은 알겠다고 알아보겠다고 하지만... 이것은 결국 서로에게 시간낭비인 것이다.
어떤 일을 맡겨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
매니저 입장에서 어떤 리포트를 바랄까?라고 생각한 끝에 나는 이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매니저 입장에서 일을 줄 건데, 감정기복이 날뛰는 게 아니라 항상 일관적인 태도로 일을 항상 중간 이상은 처리하는 사람. 문제가 있어도 패닉 하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만의 솔루션을 매니저에게 이야기하는 사람. 긍정적이고 좋은 기운을 주는 사람이면 더욱 플러스. 나와 1:1을 끝낸 후에 매니저가 어떤 기분을 느끼길 원하는가? 아.. 회사에 이렇게 많은 문제들을 처리해야 하네.. 아니면 아 얘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하는데도 즐겁게 잘하고 있구나! 하는 뿌듯함?
(물론 위에 언급된 모든 상황들은 주니어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아직 일을 배우는 시기이기 때문에.)
위에서 매니저가 친구처럼 대하랬다고 진짜 친구처럼 대하면 나만 곤란해지는 맥락과 같다. 결국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선'을 지키라는 것인데. 이 결정적인 순간이 뭐냐면 내 생각에는 이 사람의 체면을 세워주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매니저가 가장 생각하는 사람이 무엇일까? 매니저의 매니저!
개인적으로도 도움을 많이 받았던 마케터 최명화 대표님의 유튜브에 이 이야기가 나온다. 무릎을 탁 치게 되는 이야기다. 나는 영국이나 한국이나 결국 똑같다고 생각한다. 매니저가 본인의 리포트 생각을 많이 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이 사람도 사람이라서 자신의 매니저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 지를 주로 생각한다. 그러니 아무리 내가 옳은 말을 하더라도 이 매니저가 자신의 매니저 앞에서 평판이 깎여 보이는 상황은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
- 매니저가 중요한 발표를 하는 자리 또는 다른 팀들이 있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매니저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기.
영국회사는 워낙 토론을 중시하는 문화라서 내 의견을 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능력 없다고 무시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아무 사람의 의견이나 반대하면 안 된다. 특히나 그것이 나의 매니저일 경우. 물론 이것도 사람마다 달라서 좋은 매니저라면 자신의 의견에 반대한다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나 우리는 지금 여기서 '그저 그런' 매니저를 이야기하고 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매니저의 의견에 반대할 것이라면 매니저와 본인 사이에 강한 일 적 신뢰관계를 먼저 쌓은 다음에 하는 것이 좋고, 심지어 이미 그런 관계라 하더라도 나는 이런 문제들은 따로 1:1 - 사적인 대화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 자리에 다른 팀이 있다면 우리 팀 내부적으로 의견일치를 안 보이는 - 팀웍이 약해 보이는 결과를 주니 나는 1:1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걸 매니저의 말에 절대 반대하지 않고 예스만 말하라는 것으로 알아들으면 곤란하다. 많은 이들이 매니저에게 항상 웃으며 알랑방구를 끼는 것과 매니저에게 무슨 상황에서라도 옳은 말만 하는 - 항상 이 두 극단에 치우쳐있는 성향을 많이 보이는데, 나는 이중 어느 것도 맞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자는 진정성이 없어 보이고 후자는 정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매니저가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더라도 (매니저도 사람이라 가끔 이상한 말을 할 때가 있다.) 그게 크리티컬 한 게 아니라면 어느 정도 넘어가는 게 좋고 (Pick your battle - 이게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이게 크리티컬 하다면 1:1로, 사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게 좋다고 본다. 어떻게의 차이이지 이걸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매니저는 친구가 아니다. 매니저는 나의 인사 평가를 담당하고 그것에 따라 내 보너스, 연봉 인상 또는 승진을 결정하는 사람이다. 이런 힘의 논리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매니저는 내 친구가 될 수 없고 될 필요도 없다. 아무리 매니저와 격식 없고 친하게 지내더라도 매니저는 정치적으로 내가 관리해야 할 주요 관계자 중의 하나임을 잊으면 안 된다.
매니저와 친하게 지내서 따로 식사자리, 술자리도 많이 하는 경우도 보았으나 이런 자리들에서도 내 브랜드를 확실히 관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오케이지만 나는 이런 것들이 굉장히 risky 하기 때문에 나는 나와 같은 레벨의 동료들과는 친하게 지내더라도 매니저와의 1:1 관계에서는 거리를 두는 편이다. 아무리 일과 사생활이 분리된 영국이라 하더라도 술에 취해서 고성방가를 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매니저가 당신에게 헤드 자리를 맡기겠는지? 물론 그런 모습이 팀 분위기를 즐겁게 해서 매니저가 웃고 재밌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나에게 커리어적으로 내가 원하는 이익을 가져올까는 또 다른 문제이다. 내가 봤을 때 높은 자리로 잘 승진하는 사람들은, 같은 레벨의 동료들과는 별별 모습을 보이더라도, 매니저 급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술을 마셔도 본인이 컨트롤 가능할 때까지만 먹고, 오후 7시-8시 전후로는 자리를 떴다.
일을 한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돈과 돈이 묶이고 이해관계가 얽힌 사이라는 걸 인정한다면, 매니저가 나의 요구를 들어주는 걸 쉽게 하기 위해서 나도 이 매니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게 좋다. 예를 들면
- 매니저의 매니저 앞에서 매니저가 잘한 일들을 칭찬하기
이걸 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포인트는 내 마음에 없는 말을 지어내서 하라는 것 (아부)가 아니라 진짜로 매니저가 잘한 점이 있다면, 그걸 사적으로 1:1로만 이야기하지 말고 매니저가 진정으로 잘 보여야 하는 대상 - 매니저의 매니저 앞에서 해서 매니저에게 이득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어차피 칭찬과 감사를 표현할 것을 이 사람에게 더 이득이 되는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 매니저가 일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뭔지를 알아내고 그걸 최대한 서포트하기.
좋은 매니저라면 처음부터 이걸 명확히 알려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도 일 안에서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나 기준이 뭔지 모르는 매니저들도 많다. 이것이 일의 완성도인지, 스피드인지, 일 자체보다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 등등..
매니저는 나 또는 내 팀원들이 하는 일들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매니저는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방향대로 팀원에게 지시를 내리고, 자신이 만족하는 일의 완성도가 나올 때까지 피드백을 준다. 나는 경력직인 매니저가 기존에 일하고 있던 팀원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부분이 보통 이런 부분에서 의견 불일치가 생기는 것을 많이 보았다.
새로운 매니저가 들어온다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1:1에서 이런 부분들을 최대한 상세하게 이야기를 해보는 걸 추천한다. 보통은 자신만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런 막연한 기준들이 스스로 정체화가 돼있지 않은 상태라면 이걸 이야기함으로써 구체화나 우선순위를 정해 볼 수 있다. (그게 아예 없거나, 기준이 비현실적이거나 서로 모순적이라면 - 나쁜 매니저의 신호일 수도?)
그럭저럭 괜찮은 매니저라면 자신이 기존 회사에서 가지고 있던 질서나 가치관을 새로 온 회사에서 무조건 강요하지 않고 우선 대화를 해볼 것이다. 그리고 본인도 이런 대화를 함에 있어서 이 매니저가 원하는 가치관이 내가 서포트할 수 있는 가치관과 양립가능한지 생각해 보는 게 좋다. 매니저가 말하는 가치관들이 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면, 최대한으로 서포트를 해서 매니저가 원하는 팀의 방향이나 완성도가 나오게 도와주어야 한다. 매니저 입장에서, 내가 추구하는 방향을 최대한으로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예뻐 보이고 도와주고 싶지, 항상 반대하고 딴지를 거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강력한 불일치가 생긴다면, 매니저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서로의 일 가치관이 안 맞는 것으로 보고 팀을 바꾸거나 회사를 바꾸는 옵션을 고려해 보는 것이 좋겠다.
물론 결과는 나쁜 매니저를 만나는 경우와 똑같겠지만 - 나는 매니저가 정말 나쁜 매니저였는지, 아니면 단순히 나와 가치관이 달라서 그런 것인지 이 두 가지가 다름을 이해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그걸 비난하거나 자신의 입장만이 정답임을 강요하는 권력자를 우리는 '꼰대'라고 한다. 근데 리포트 자신도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매니저를 나쁘다고 매도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부정적인 임팩트는 전자가 훨씬 크겠지만) 단순히 매니저와 나의 일적인 가치관이 다르다면, 내가 일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뭐고 이 중에서 타협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 것이 뭔지. 이 정보와 기준을 가지고 다음 회사나 팀을 알아봐야 한다. 이런 과정 없이 단순히 '나쁜 매니저'라는 결론을 가지고 다음 회사를 간다면, 본인이 정말로 다음에 자신에게 맞는 회사를 얼마나 잘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