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자 대면
내가 팀장 찰리(내 매니저의 매니저)와 면담을 잡은 건 내 매니저 켈리에게 일하는 방식에 대한 피드백을 줬을 때 전혀 해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1 면담을 하면 켈리는 내가 꺼낸 이야기에 다른 대답을 했고 슬랙 메시지에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미팅에서 켈리가 다른 대답을 할 경우 내가 재차 원래 주제로 다시 돌아가자고 화제를 돌리려 하면 켈리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졌고 분위기만 험악해졌다. 딱 봐도 심기 불편해 보이는 매니저를 두고 나도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불편했다.
나는 켈리와 일하면서 단 한 번도 내가 이 사람에게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물론 우리 모두는 회사에 일을 하러 왔고 우리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회사 밖에 있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켈리와 나의 관계 문제는 내가 이 사람에게 있어서 어떤 하나의 기계 부속품처럼 다뤄지며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존중받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번아웃 증상으로 병가를 낼 때면 일 진행이 자기가 원하는 속도대로 나지 않아 초조해하고 급박해하는 그녀의 압박이 그대로 느껴져 더 쉬어야 함에도 하루 만에 바로 복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회복이 다 되지 않은 상태라고 뻔히 쓰여있는 내 슬랙 상태 메시지를 보고도 그녀는 복귀하는 바로 다음날 아침 8시부터 마치 복수를 하듯 무지막지한 일거리들을 던져놓았다.
그녀는 내가 병가를 너무 자주 낸다고 했다.
내가 회사 시스템에 접속해 병가일수를 직접 확인해 봤을 때 캘리와 함께 일한 10개월간 번아웃으로 고통받는 와중에도 12월에 한번, 1월에 1번 총 2일밖에 병가를 낸 적이 없었다.
켈리에게 나는 아프면 골치 아픈 대상이고 항상 회사에 나와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가 원하는 양만큼, 속도만큼 일을 해내고도 그 흔한 칭찬이나 격려 하나 받지 못하는 기계 같은 존재였다.
나는 팀장 찰리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급한 일이라며 1:1 면담을 요청했을 때, 조금 기다려야 하긴 했지만 금방 찰리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나도 알고 있다. 이런 중요한 미팅에는 요점을 논리적으로 정리해서 적어가고, 매니저를 고발한다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아니라 사실 중심으로, 그리고 그 사실이 내가 일을 하는데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 미팅을 열심히 준비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노트에 차분히 정리했으며, 적어놓은 대본을 가지고 열심히 연습했다. 나는 절대 감정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정말 열심히 연습을 했다. 이제 좀 연습한 만큼 차분히 이야기할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을 때, 팀장 찰리가 미팅에 들어왔다.
"How are you?"
걱정스러워 보이는 찰리의 얼굴, 그리고 영국인들이 매일 하는 그 뻔한 한마디. "How are you"에 눈물이 터졌다. 내가 어떠냐고? 켈리는 단 한 번도 내게 관심이 있던 적이 없었다. 그녀는 항상 내가 하는 일 그리고 결과만 궁금했다. 눈물이 갑자기 쏟아졌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이건 내 의도가 아닌데. 나는 지금 울면서 내 매니저를 고자질하려고 나온 불쌍한 부하직원 행세를 하려고 지금 이 면담을 잡은 게 아닌데. 그러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공과 사가 뚜렷하고 일에서 내 사적인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나로서는 이 상황이 나도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It's okay, It's okay.."
내가 갑자기 감정적으로 울어서 미안하다고 하자 찰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괜찮다고 여러 번 반복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도 감정이 좀 가라앉았고, 내가 원래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을 차분히 전할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찰리는 무거운 표정으로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필기를 했다. 내가 이야기를 끝마치자 찰리는 이 상황에 대해서 더 조사해 볼 시간을 달라고 했다. 예상하던 바였다. 켈리와 나의 관계는 여러 면에서 이미 꼬일 대로 복잡하게 꼬여있었고 한 번의 대화로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번아웃 증상으로 재택근무를 요청하자 찰리는 그 자리에서 흔쾌히 허락을 했고, 우선 내 번아웃이 해결될 때까지 당분간 재택을 하는 것으로, 그리고 나머지 일은 천천히 해결해 가기로, 그렇게 나의 1:1 면담은 끝이 났다.
HR과도 연락을 취했다. 회사의 규모가 커서인지 직원들 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전문 팀이 따로 있다는 것도 이 사건으로 인해 처음 알았다. 회사 내의 연락책을 통해 이런 문제들을 잘 처리한다는 HR 담당자의 이름을 받았다. 며칠을 기다려 어렵게 잡은 면담. 그러나 그녀는 내가 이미 아는 이야기들을 반복해서 할 뿐이었다. 그녀는 내가 이미 시도해 봤고 알고 있는 방법 '상황, 상대방이 한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이 불러일으킨 결과' 형식을 통해 매니저에게 피드백을 전달하라고 이야기했다. 그걸 내가 하지 않으면 케이스 진행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내가 여러 차례 시도를 했고 이 형식에 맞춰 피드백을 전달했다고 이야기를 했음에도 그녀는 고장 난 녹음기처럼 반복해서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결국 지친 내가 알겠다며 다시 시도해 보겠다고 답을 하는 것으로 이 면담은 싱겁게 끝이 났다.
또 도대체 어떻게 켈리에게 이 피드백을 전달해야 할까 고민하는 와중에, 찰리가 나와 켈리, 3자 대면 면담을 잡았다. (그리고 내 HR 케이스 담당자는 한 달 후 퇴사를 했다.)
굉장히 중요한 면담이었다. 미팅을 하기 전 찰리가 대략적으로 미팅이 어떻게 진행이 될 것인지 언급을 해주었기에 미리 준비를 하고 갈 수 있었다. 대략적으로 1. 내 관점에서 있었던 일 설명 2. 켈리 관점에서 있었던 일 설명 3. 해결책 모색의 순서였다.
찰리와의 미팅을 준비했던 것처럼 노트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논리 정연하게, 사실과 결과 위주로 적었다. 그리고 감정적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으며 연습을 해보았다. 그리고 3자 대면의 날이 왔다.
내가 미팅에 들어가자 찰리와 켈리가 이미 미팅에 들어와 있었다. 분위기는 생각보다 무겁지 않고 화기애애 보였다. 시작이 좋아 보였다. 찰리는 가볍게 스몰톡으로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미팅을 이끌었다.
첫 번째는 내 순서였다. 나는 내 관점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리고 켈리의 행동이 내게 미친 결과들을 차분히 설명했다. 그런데 내가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켈리가 몇 번 끼어드는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찰리는 우선 내 얘기를 먼저 듣자고 켈리를 제지했다. 감사한 순간이었다. 그건 바로 켈리의 매니저로서 찰리가 해야 하는, 그리고 찰리만이 할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켈리의 순서였다. 그녀는 조금은 긴장되 보였지만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너가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명의 매니저들을 겪고 새 팀에 들어오면서 얼마나 고생을 했고 힘들었을지 이해가 가. 새 팀에 들어와서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너가 유독 힘들어했던 것이 아닌지, 그래서 이런 상황들이 생긴 것이 아닌지.."
나는 너무나 놀랐다. 내가 힘들었을 거라는 한 마디로 시작을 한다고? 내게 한 번도 격려나 칭찬,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한 적이 없던 켈리가? 이 첫마디를 듣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걸 알고 있었어? 너무나 오랫동안, 매니저로부터 듣고 싶었던 따뜻한 한 마디에, 나는 이미 눈 녹듯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래, 이 사람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 거야. 자기 자식도 있고 업계에서 나름 오래 일한 사람인데. 내가 오해를 했나 봐. 알고 보니 나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사람이었구나.
이 모든 것이 내 오해처럼 느껴지고 내가 이 사람에 대해서 단단히 잘못 알고 있었구나라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켈리의 요점은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승진하고 싶은 욕심, 새 팀에 들어와서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번아웃이 왔을 거라는 이야기였고 이미 내가 내 스스로에게 압박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켈리가 보내는 지시사항들을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것이 요지였다.
지금 생각하면 10%는 맞고 90%는 틀린 말이지만 (내가 승진을 하고 싶었고 열심히 하려던 것은 맞지만 번아웃은 켈리의 마이크로매니징으로부터 발생된 것이기 때문에) 그때는 이미 번아웃으로 인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에서, 내가 그토록 듣고 싶어했던 따뜻한 한 마디를 상사로부터 들었다는 사실 하나로도 내 마음은 이미 눈 녹듯이 녹은 상태였다.
"그래요, 제가 너무 잘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주변을 유연하게 살펴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 좀 더 켈리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유연하게 협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같이 고민해볼게요."
이미 내가 켈리의 말에 감동을 받은 시점부터, 미팅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고 내 마지막 말로 인해 찰리와 켈리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나와 켈리가 말을 하는 동안 주로 듣고 있기만 하던 찰리는 싱긋 웃으며
"우리가 문제 해결을 여기서 의논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앞으로 둘이 잘 같이 이야기해봐." 라며 미팅을 마쳤다.
미팅을 마치고, 나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앞으로 켈리와의 관계가 좋아질 날만 남았구나. 실날 같은 빛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꿈에도 몰랐다. 이로 부터 두달 후 켈리가 나를 인사고과 대상에 넣어놨다는 소식을 들을 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