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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10억 벌어주고 인사고과대상 된 썰 -4-

웃으면서 등에 칼 꽂는 사람들

by 곰비

삼자대면 이후 켈리의 마이크로매니징이 없어지진 않았다. 여전히 일은 많고 고됬지만, 나는 삼자대면 이후 내 노력이 인정받고 있구나 철썩같이 믿었고, 힘들지만 승진이 될 때까지만 버텨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이 팀에서 하는 프로젝트들이 회사 내에서 큰 주목을 받고 중요한 프로젝트들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기에.


그렇게 버틴 지 두달 째, 내 연례 인사평가 (퍼포먼스 리뷰) 날이 다가왔다.


계속해서 미뤄지는 내 인사평가

이상했다. 켈리가 관리하는 다른 직원들은 모두 다 이미 평가를 받았는데, 나만 내 점수를 모르고 있었다. 내 인사 평가 면담은 다른 사람보다 굉장히 늦게 잡혀 있었다. 혹시 더 일찍 할 수 있냐고 물어보자 켈리는 알겠다고 하며 날짜를 옮겼다. 그러나 바로 그 당일 그녀는 갑자기 병가를 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렇게 그녀는 2주를 쉬었다.


켈리가 회사에 나오지 않는 동안 나는 찰리 (켈리의 매니저이자 내 팀의 팀장) 를 오피스에서 마주쳤다. 찰리는 런던에 살지 않기 때문에 다른 지역 오피스로 출근을 해서 그를 실제로 자주 볼일은 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가 나를 피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인사평가 시즌이라 내가 스스로 너무 예민해진 건 아닐까 하고 기분탓으로 넘겼다.


길고 긴 기다림 이후 켈리는 회사로 복귀했다. 인사평가 면담을 하기 1시간 전, 켈리가 갑자기 찰리도 미팅에 들어올 것이라는 갑작스러운 통보를 했다. 켈리가 작년 4개월 동안만 내 매니저였기 때문에 내가 혹시 남은 8개월과 관련해서 질문이 있으면 찰리가 대답해 줄 것이라는 이유를 대며. 나는 곧바로 알겠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회사에 벌어다 준 10억

현 회사에는 5단계의 평가 점수가 있다. 1단계가 가장 최하의 점수고 5단계가 가장 최고의 점수. 5단계의 점수를 받은 사람은 바로 승진이 보장되었으나 20여명으로 꾸려진 한 팀에 1명만 그 점수를 받을 수 있었기에 대부분은 중간값인 3단계를 받았다.


나는 내가 4단계를 받을 거라고 예상했다. 왜냐면 내가 작년 초에 했던 프로젝트가 회사에 10억을 벌어다 줬다는 기록적인 성과를 냈기 때문이었다. 그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프로덕트 매니저는 회사에서 굉장히 높은 위치에 있기도 했고 (Principal 레벨) 이미 내게 굉장히 좋은 피드백을 남겼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가 같이 한 프로젝트로 Head of Product로 승진했다.)


켈리와 나의 관계가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인사평가는 1년을 통틀어 종합적으로 평가를 하는 것이고 내가 번아웃이 온 시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가를 가서 어차피 일 진행이 안되는 연말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번아웃이 왔어도 나는 쉬지도 못하고 일을 꾸역꾸역 해냈기 때문에. 특히나 10억이라는 숫자는 무시할 수 없는 수치였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에 3단계를 받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현 회사에서 거의 8-90%의 직원들이 3단계를 받고, 그 외의 점수를 주려면 매니저들이 굉장히 그걸 위해 싸워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런 불편함 때문이라도 최소 3단계를 받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4단계의 점수를 줬고, 이 점수를 받음으로서 내가 비공식 인사고과 대상(PiP - Performance improvement Plan)이 됬다는 말로 평가를 시작했다.



평가서에 쏙 빠진 나의 번아웃

내가 벙 쪄있는 동안 그녀는 그녀가 쓴 평가 보고서를 읽어내려 갔다. '일을 빠르게 수행해내는 능력이 부족하다.' '시간관리 능력이 부족하다.' '매니저와의 협업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매니저의 피드백이나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다.' ... 간간히 가뭄에 콩나듯 나의 성취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영국인들이 보통 말하는 "it's great but" 과 같은 문장에서 but 앞에 있는 건 그냥 없는 이야기라고 치면 되듯, 그녀는 연신 '그러나' 를 붙이며 내가 이룬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왜 이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주장을 늘어놓았다.


이전에도 그랬듯 그녀가 든 예시에는 명확함이 없었다. 어떤 맥락과 상황이었는지, 그냥 뭉뚱그려 놓아 구체적인 시기를 알기 힘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억울하게 했던 건, 내가 번아웃이 온 시기에 했던 말들을 인용하면서, 내가 번아웃이 왔다는 맥락만을 쏙 빼놓았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켈리에게 번아웃이 왔으니 일을 조금 줄여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녀는 알겠다고 말만 하고 전혀 일을 줄여주진 않았지만. 그녀는 평가서에 내 번아웃을 쏙 빼놓고 나의 업무 수행 능력이 부족한 이유에 내가 주어진 일을 줄여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사실을 증거로 써놓았다.


켈리와 일하는 방식을 조율하려고 내가 의견을 낸 부분들은 내가 상사의 피드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이야기로 탈바꿈 했다.



팀을 나가줬으면 해

충격적이었다. 내가 굳은 표정으로 켈리가 하는 말을 듣는 동안, 찰리는 사색이 된 얼굴을 하고는 급작스럽게 덧붙였다.


"지금 팀 말고 다른 팀에 굉장히 좋은 기회가 있어. 그 팀은 훨씬 자유도도 높고 여유로운데, 그 팀에 가보는 건 어때? 너에게 훨씬 더 맞을 거야."


지금 내게 장난하자는 건가? 2년동안 네 팀에서 피와 땀을 흘려, 10억이라는 성과를 내고, 심지어 번아웃까지 온 직원에게, 보상이나 격려는 커녕 팀에서 나가라고? 심지어 지금 내 인사평가 면담이 다 끝나지도 않았다. 단물 다 빼먹고 지금 번아웃이 왔으니 내가 필요없어졌고 그래서 나가달라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찰리는 그래서 이 미팅에 있었던 것이다. 그냥 나를 내보내는 걸로 둘이 이미 합의를 했구나. 켈리와 나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기엔 골치 아프니까 어차피 내가 번아웃도 왔겠다, 이걸 업무 능력 저하 구실삼아서 그냥 너만 나가면 문제 끝. 으로 해결하기로 했구나. 마이크로매니저에게 시달리는 부하직원의 번아웃이 아니라 그냥 이 팀에 안맞는 직원 하나가 일으키는 문제로 처리해버리기로 했구나. 내가 2년을 이 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서 일했는데도! 이 한사람 하나 때문에!



절망으로 끝난 면담

하지만 나는 곧 마음을 가다듬고, 피드백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그러는데 A 프로젝트를 하는 동안 구체적으로 어떤 시기를 말하는지 알려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켈리는 아무렇지 않게 이 시기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시기가, 내가 이미 찰리와 켈리 모두에게 번아웃이라고 명확히 밝힌 시점임을 밝히며, 이 평가서가 작년 중에 특정 부분, 내가 번아웃이 왔던 시점 위주로만 반영이 된 점이 우려스럽다고 이야기했다.


켈리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건 갑자기 찰리가 그녀의 편을 들고 나섰다는 것이었다.


찰리는 다른 시기를 예시로 들며, 이 시기는 너가 번아웃이 온 시기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나는 사실로 반박했다. 번아웃이라는 것은 진행이 계속해서 되다가 한 순간에 터지는 것이고, 내가 매니저에게 번아웃을 알린 시점과, 실제로 번아웃을 겪고 있는 시기 사이에는 갭이 있으며, 이 시기는 내가 실제로 프로젝트를 동시에 5개를 진행하면서 번아웃을 이미 경험하던 시점이었음을.


찰리는 당황하며 이는 자신이 몰랐던 부분이라고 빠르게 덧붙였다. 그러자 켈리는 굉장히 화난 얼굴로 지금 내가 인사평가 점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체가 절대 용납될수 없다고 말했다. 내가 지금 자신의 주장에 사사건건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내가 이 점수를 받은 이유라고 덧붙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찰리는 계속해서 내게 팀 이동을 생각해보라고 재차 권유했다. 찰리에게 고려해보겠다고 대답했다.


노트북을 닫았다. 원래 이 면담이 끝나고 약속이 있었지만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양해를 구하고 약속을 취소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저녁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오직 남자친구만이 나를 위로해주었다. 회사에 내 편은 단 한명도 없는 고립감이 느껴졌다. 믿었던 찰리의 배신. 절망감. 허무함. 분노. 억울함. 여러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내일 아침 7시면 다시 또 켈리가 내게 숨막히는 업무 지시 메세지들을 보낼 것임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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