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상사에 대처하는 전략
그날 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내 커리어 인생 최악의 마이크로매니저 켈리 밑에서 버틴 이유는 단 하나, 승진. 그리고 복잡한 취업비자 문제가 얽혀있었다.
보통의 영국인이라면 어떠했을까? 자신이 오랫동안 인정받지 않거나 승진이 안된다고 느끼는 순간, 매니저가 마이크로매니저라고 느끼는 순간, 10억을 벌어다주고도 인사고과대상이 되었다는 불공정한 평가를 받는 순간, 뒤도 안 돌아보고 회사를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취업비자를 받은 외국인이었다. 그리고 그 문제는 회사를 떠나면 되는 간단한 사안들을 복잡하게 했다.
취업비자를 받은 상태라는 것은 내가 런던에서 6년간 쌓아온 삶 자체가 회사의 고용상태와 면밀히 묶여있음을 의미했다. 회사에 고용되지 않는 순간, 나는 60일 내로 영국을 떠나야 한다. 회사를 그만두고도 자신의 연인, 친구들, 살고 있는 집과 자신의 생활방식이 그대로 존재할 수 있다는 건 특권이었다. 이건 내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는 권리였다.
현 회사로 이직을 하면서 굉장히 높은 취업비자 비용, 변호사 비용을 지원받았다. 그리고 내 계약서에는 2년 내 퇴사 시 이 비용을 뱉어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2년 이내의 너무 잦은 퇴사는 이직하려는 새 회사에도 부정적인 인상을 줄 수 있기에 첫 2년은 어떻게든 버티려 했다. 켈리 밑에서 악착같이 버틴 나날들은 승진도 승진이지만 이 2년을 어떻게든 메꾸려는 나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나의 배신감, 모욕감과는 별개로 나는 당장 회사를 그만둘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켈리와의 지난 6개월을 악착같이 버텼기에, 이 회사와의 2년을 얼추 채워갔다는 것.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전략을 세웠다.
바로 1부터 10까지 켈리가 시키는 대로 무조건 다 하는 예스맨이 되자는 전략이었다. 기한은 켈리에게서 벗어나기 전까지. 내 매니저 켈리와 팀장 찰리는 진실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들에게 내 진짜 생각, 의견을 아무리 부드럽게 포장하고 예쁘게 전달해 봤자 그들은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특히 켈리에게는 진실보다 내가 그녀가 시키는 대로 '무조건' 따르는 게 중요했다. 그녀가 쓴 인사평가서를 다시 읽어봤을 때, 눈에 훤히 보였다. 내가 내 프로젝트를 자신감 있게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 들었구나. 내 의견이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켈리에게 불편함을 일으키는구나. 내가 나 스스로 원하는 걸 알고, 그걸 정확히 표현할 수 있고, 했다는 것 자체가 싫었구나. 내가 아무리 많은 사람들과 협업을 잘하고 좋은 피드백을 받고, 10억이라는 성과를 내도, 내가 일을 하는 방식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하나라도 되지 않는다면, 그게 이 사람에게 굉장한 분노를 일으키는구나.
이직을 준비했다. 바로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포트폴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팀장 찰리에게, 찰리가 언급한 새로운 팀 이동이 언제쯤 가능한지 물어봤다. 탈출구를 짜는 동안 이 시기를 버티고 인사고과대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략을 시행에 옮겼다.
인사평가 바로 다음날 아침 7시 반. 공식 업무시간은 9시였지만 자신이 일을 할 때 내가 슬랙 온라인이 되어있지 않으면 불안감에 유독 더 많은 메시지를 보내는 켈리의 특성상 나는 일부러 일찍 일을 시작했다. 역시나 켈리가 내게 지시한 업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나는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일부러 7시 반에. 내가 켈리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일을 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 보통의 나라면 켈리가 업무지시를 보낸 것을 잘 읽어보고, 내 판단대로 일을 시작해서 켈리에게 진행상황을 업데이트를 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사평가서에서 드러난 켈리의 특징은, 내가 자신감 있게 스스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사안이었기 때문에. 나는 켈리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하직원에 빙의해 메시지를 보냈다.
좋은 아침이에요! 보내주신 업무 A 관련해서 내용을 읽어봤는데, 이 부분이 좀 헷갈려서요. 어떻게 진행을 해야 하는지 지시사항을 내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면 프로젝트에 정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적당히 귀엽고 다정해 보이는 이모티콘과 함께. 켈리가 일하는 시간은 제각각이었지만 요점은 메시지를 보냄으로써 그녀가 일하는 시간보다 더 일찍 일을 한다는 '증거'를 보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부하직원이 스스로 일을 할 것이라는 신뢰가 없는 매니저이기에.
한 시간 반 후 답장이 왔다. 아직은 좀 거리를 두는 것 같은 태도였지만 그녀는 5-6줄에 달하는 지시사항을 보냈다. 바로 답장을 했다. 켈리는 내가 보내는 메시지에 바로 답장을 하지 않지만, 내가 그녀의 메시지에 바로 답을 하지 않으면 그녀는 곧바로 불편해하고 초조해지기 때문에.
이렇게 빨리 알려주셔서 정말 너무 감사해요! 바로 그대로 할게요. (친절하게 웃는 이모티콘)
몸서리가 쳐지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팀을 옮기거나 이직을 하거나 어쨌든 그전까지 나는 '고용된 상태'가 필요했다. 비공식 인사고과 대상이 됐으니 6주 후에 또 평가를 받고 이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면 공식 인사고과대상이 된다. 공식 인사고과대상이 되고 나서도 또 통과가 안되면, 회사에서 해고가 된다.
어쨌든 나는 이 지옥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켈리가 시도 때도 없이 보내는 메시지들을 우선적으로 처리했다. 내가 이미 하고 있는 미팅과 일은 제쳐두고, 전사 미팅이나 팀 회의 중 그녀가 요구사항들을 보내면 미팅은 듣는 척 마는 척하고 그녀의 요구를 우선시해서 끝마쳤다.
오전 10시에 미팅에 들어가야 하는데 갑자기 켈리가 그녀가 쓸 프레젠테이션에 들어갈 이미지를 만들어달라고 메시지를 보내면 미팅을 취소하고 그녀가 원하는 이미지를 30분 안에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갑자기 프리젠테이션 이미지가 맘에 안 든다고 하면 그녀가 원하는 수정사항을 내 점심을 미루고 만들어주었다. 오후 3시에 갑자기 내가 원래 하던 프로젝트 A, B, C와 동시에 그녀가 하던 프로젝트 D에 그녀 대신 일을 하라고 하면, 묻지 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그녀가 시키는 일을 했다.
그녀가 내가 만든 프리젠테이션, 내가 진행한 프로젝트를 자기가 한 것처럼 남들 앞에서 발표를 할 때면,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그걸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프리젠테이션을 잘했는지만 칭찬했다. 그녀는 만족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때, 켈리가 나에 대한 거리감을 푸는 것이 보였다. 이때쯤 나는 켈리와 1:1 면담을 잡았다. '사과' 미팅이었다. 인사고과 평가 이후 첫 1:1 면담. 나는 이렇게 즐겁고 편안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준비한 나의 연기를 펼쳤다.
"지난번 인사 평가 미팅 때 제 행동에 대해 사과를 드리고 싶어서요. 제 언행이 공격적이어서 들으실 때 많이 불편하셨을 것 같아요. 이번 점수 주신 것, 제가 제대로 배워나갈 기회라고 생각하고 고치고 반성해 나갈 테니 많이 이끌어주세요."
그러자 켈리는 굉장히 흡족해하며 내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 행동을 '고칠' 때까지 물심양면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벌써 일주일 만에 내 업무 성과가 이미 많이 '개선'이 되었다고 하며 앞으로 쭉 이렇게만 하라고 했다.
내가 굽히고 그녀에게 맞출수록, 그녀가 나르시시스트라는 것이 명확히 드러났다.
억울하냐고 물으면 당연히 억울했고, 부당했고, 회사를 다녀오면 진이 빠졌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는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업데이트하고, 새로운 회사에 지원을 했다. 믿을 수 있는 친구들에게 내 상황을 설명하며 새 회사에 추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물어보았다.
물론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회사 내의 정의 실현이었지만, 나르시시스트 매니저에게 그들의 잘못을 인정받고, 옮고 그름을 따지고 사과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직 또는 팀이동 전까지 이 회사에서 인사고과 평가 기간을 무사히 통과하여 회사의 고용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켈리가 나를 '말 안 듣고 지 맘대로 구는 싸가지없는 부하직원을 개과천선 시킨 유능한 상사' 이미지를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 내가 인사고과 통과가 된다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었고, 해야 만 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짜놓은 판을 켈리가 실제처럼 느끼고 그렇게 믿어야 했다.
진실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진실의 값어치를 설명하거나 나눠 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달콤한 거짓을 주고, 나는 내 진실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진실을 나눠주면 되었다. 그렇게 나는 그날들을 버텼다.
흥미로운 것은, 내가 켈리의 '충실한', '개과천선한' 부하직원이 되면서, 그녀는 기이한 행동들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 이상한 행동들을 반복할수록 나는 그녀가 얼마나 자존감이 낮고 타인의 인정에 목마른 어린아이 같은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그녀는 묻지도 않은 그녀의 사생활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텅 빈 구멍을 알게 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