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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만보 Apr 28. 2020

시선

환절기에 한 번씩 다니는 집 근처 병원에는 기억력이 비상한 간호사 선생님이 있다. 이 선생님은 병원에 오는 아이들과 부모의 얼굴을 기억했다가 길에서 마주쳤을 때 'OO이 어머니 안녕하세요'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넨다. 얼마 전에는 마스크를 쓰고 지나가는 데도 기가 막히게 알아보시고는 반갑게 안부를 물어왔다. 달인 수준의 눈썰미에 놀라서 어쩜 그렇게 잘 알아보냐며 길에서 선생님을 붙잡고 물개 박수를 쳤다.


몇 번 마주쳤어도 그 사람이 누구였더라 기억나지 않아 애를 먹는 나로서는 한 번쯤 가져보고 싶은 부러운 능력이다. 얼굴을 잘 기억하는 재능이 없는 탓에, 발전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관계, 얻지 못한 호감 등 살면서 이런저런 손해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뿐일까, 알만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면서 괜한 오해를 사거나 서운함을 느끼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낯선 사람과 마주할 때 웬만해선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한다.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행동은 하는 입장에서도 당하는 입장에서도 불편하다. 관계가 조금 편해지고 나서야 대화를 하면서 눈, 코, 입으로 시선이 향하고, 그러면서 아 이렇게 생겼었구나 하고 조금씩 알아간다. 합리화하자면 나 같은 사람은 가볍게 한두 번 마주친 이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어릴 적에는 상대방과 대화할 때 코 주변을 보는 것이 좋다고 배웠다.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실례라고 했다. 길을 걸어가다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시비가 붙었다는 흉흉한 사건들까지 듣게 되면서 얼굴, 특히 눈을 응시하는 것은 득 보다 실이 많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다 남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무심함이 더해져서, 결과적으로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기억도 잘 못하는 나의 행동과 성격이 만들어졌다.


얼마 전에는 한 강의장에서 앞줄에 앉았다가 강사와 여러 번 아이컨택을 하게 되었다. 강사는 한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5초가 넘도록 그 사람만 온전히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견디지 못하고 내가 먼저 시선을 떨어뜨렸다. 잘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강사의 바디랭귀지였겠지만 그 때문에 언제 또다시 눈이 마주칠까 불안해하며 강의를 들었다. 어쨌거나 끝난 뒤에는 강사의 얼굴이 평소보다 구체적으로 기억에 남았다. 부리부리한 눈과 코의 생김새, 웃는 입매는 확실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별다른 의도는 없다. 몸에 밴 습관일 뿐이다. 하지만 눈싸움에서 늘 고개를 숙이는 나 자신에게 어색함을 견디고 시선을 조금만 더 도전적으로 바꿔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자신 있게 상대의 눈을 보고, 얼굴을 몇 초 더 응시하고, 전체의 생김을 훑어보는 것은 어떨까. 닮은꼴 유명인을 떠올린다거나 눈에 띄는 특징을 머릿속에 입력하는 것도 좋겠다. 그렇게 해서 한 번 본 사실이 기억나면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까지도 상상을 해본다. 누군가가 기억하고 알아봐 준다는 것은 고맙고 기분 좋은 일이니까.


오래되어 굳어버린 성향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지금 습관을 그대로 유지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또 괜히 한번 나를 흔들어 바꿔보고 싶을 때가 있다. 맞은편에 앉은 누군가와 자연스럽게 눈을 맞추었을 때, 옆에 지나가는 익숙한 얼굴을 내가 먼저 알아차리고 인사했을 때, 나만 알 수 있는 뿌듯함이 느껴질 것 같다.


시선이 어색하지 않은 거리는 이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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