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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만보 May 05. 2020

나의 작은 취미 생활

몸은 편하나 정신은 산만한, 휴일 같은 평일이 길어지며 오랜만에 미니어처 하우스 만들기 키트를 뜯었다. 고개를 숙이고 앉아 종이를 오리는데 가족들의 시선이 뒤통수에 꽂힌다. 엄마라는 사람은 완성품이 나올 때까지 잘 씻지도 않고 잠도 제 때 안 잘 뿐만 아니라 때로는 밥 차려주는 것도 잊는다. 그래서 정말 가끔, 아주 시간이 많을 때, 가족들의 눈치를 살피며 한 번씩 취미 생활을 시작한다.


박스를 펼칠 때의 설렘, 노가다의 결정체인 부속품들이 모여 어렴풋이 사물의 형태가 잡힐 때의 환희, 아무리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조잡하고 부실한 설명에 대한 분노, 부족한 설명을 짐작으로 해석하여 연결하다가 딱 맞아떨어졌을 때의 쾌감... 혼자 울고 웃고 괴성을 지르며 자르기와 붙이기를 무한 반복하다 보면 서너 시간은 금세 지나간다. 새벽까지 눈을 부릅뜨고 본드칠을 한 다음 날에도 아침엔 희한하게 눈이 번쩍 떠지고 다시 책상과 한 몸이 된다.


혼자 하는 취미이다 보니 좋아하는 유튜브 영상을 라디오처럼 틀어놓고 작업을 한다. 재료를 오리고 풀로 붙이는 밑작업들은 단순하지만 전체 과정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 긴 시간 동안 귀로는 신사임당과 런던오빠의 만담을 듣고 손은 칼질과 풀질을 하느라 바쁘게 움직인다.


밑작업이 끝나고 덩어리들을 연결하는 단계에서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하여 제 짝이 아닌 부품끼리 강력 본드로 접착하는 순간 그동안의 노력이 날아갈 수도 있다. 이때에는 소음을 차단하고 고요함 속에서 작업하는 것이 좋다. 모든 생각을 걷어내고 오직 손끝에만 집중하는 몰입의 순간은 무언가를 만드는 취미에 빠져들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완벽한 몰입을 유지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는 않다. 텐션이 어느 순간 느슨해지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잡다한 생각들이 끼어들기 시작한다. 며칠 전 나눴던 대화를 복기하기도 하고,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 어땠을까 하는 상상까지, 생각은 꼬리를 물고 뻗어나간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시 돋친 말로 상처를 입혔던 기억,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호기롭게 던져놓고 누군가를 실망시켰던 기억,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서 중요한 순간 엉뚱한 대답을 내뱉었던 기억. 좋았던 것보다 아쉬웠던 일들이 더 많이 떠오른다. 생각의 나래를 펼치다가 퍼뜩 다시 손끝으로 정신이 돌아온다.


단순 작업을 핑계로 다른 차원의 정신세계에 순간 이동하듯 빨려 들어가 과거의 나를 들여다 보고, 후회하고, 반성하다가 현재의 나에게로 돌아온다.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영원한 형벌같은 이 여정을 반복하는 나를 위로한다. 몇 년이 지나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흑역사들은 떠오를 때마다 괜찮다고 말해주며 잠재운다.


이런 몰입과 자기 성찰을 3-4일 반복하다가 하나의 완성품이 탄생한다. 작은 식물원도 만들고 카페도 만들고 사람과 동물이 태어나기도 한다. 며칠에 걸쳐 폐인처럼 앉아서 조립을 끝냈을 때 비로소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기로 충만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피곤함을 잊는다.


한 가지에만 집중하여 주변을 어둡게 만드는 것이 명상이라고 한다. 명상의 '명'은 의외로 어둠을 뜻하는 한자이다. 주위의 자극에 불을 끄고 손 끝에 불을 밝히는 나의 작은 취미 생활이 명상에 버금가는 효험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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