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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만보 May 28. 2020

행복한 기억


아버지는 과식은 안 하지만 먹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식사 때는 밥과 김치만 있어도 주어진 양을 정성껏 먹었고 늘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추억의 음식이 있다. 어릴 적에 밥상에 한 번씩 스팸이 통째로 올라왔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반찬이자 우리집 특식이었다. 뚜껑을 따면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아버지는 아이스크림을 떠내듯이 숟가락으로 햄을 떠서 밥에 올려 드셨다. 게다가 김치는 꼭 마요네즈와 함께 드시곤 했다. 그 때는 우리집이 그러하니 다른 집도 당연히 김치를 마요네즈에 찍어먹는 줄 알았다. 나중에 친구들에게 우리집 밥상 얘기를 했더니 느끼하다며 질색을 했다.




병실에서 잠든 아버지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오른손을 움직여서 입으로 가져간다. 옆에 있던 환자 보호자 한 분이 아버지가 꿈속에서 음식을 먹는 거라고 말해주셨다. 약에 취해 하루 종일 잠을 자다보면 행복하고 그리운 시절의 꿈을 꾼다고 했다. 맞은편 침대에 누운 아저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양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입원을 하기 전까지 성가대에서 지휘를 했다고 아주머니가 얘기해주셨다.


깊은 잠에 빠진 아버지를 지켜보면 꿈에서 어떤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스팸을 떠서 입 안에 한가득 넣었을까, 신 김치에 마요네즈를 듬뿍 찍어 한 입 물었을까. 아니면 오랜만에 아버지의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 앞에 앉아 있었을까. 병상에 누워 그리워하는 기억이 고작 좋아했던 음식을 먹을 때라는 것은 조금 시시하게 느껴졌으나 꿈에서 잠시라도 고통을 잊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의식 상태로 침대에 누워 지휘봉을 흔드는 아저씨와 무언가를 숟가락으로 떠서 천천히 입에 넣는 팬터마임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아버지. 긴 간병 생활에 지친 보호자들은 꿈 속에서 건강한 시절로 돌아간 아버지들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기도 했고,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꿈꾸는 것이 딱하여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해가 잘 드는 고요한 병실에서 느리게 움직이던 아버지의 비쩍 마른 팔은 오래도록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당신은 언제 행복을 느끼는가' 하는 질문을 가끔 듣는다. 그럴 때마다 습관적으로 어떤 것을 성취했던 특별하고 기쁜 순간을 떠올린다. 무언가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보상 받고 뿌듯한 감정을 느낄 때 잠깐씩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의 끝자락에서 무의식이 기억하는 행복은 힘들게 손에 넣은 무엇이 아니라 의외로 평범한 일상이다. 알면서도 자꾸 잊는다.


버스에 탄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줄 때, 가족이 둘러 앉아 보드게임을 할 때, 남편의 손을 잡고 동네를 산책할 때, 친구와 커피를 앞에 놓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때... 매 순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인 것처럼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다짐을 다시 흔들어 깨운다. 오글거려서 괜히 인색하게 굴었던 애정 표현에 너그러워진다. 아버지의 기억 한 조각으로 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소중한 시간이 된다.



마법의 소스 마요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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