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이 극도로 예민하다. 여럿이 똑같은 음식을 먹어도 나 혼자 탈이 난다. 덜 익은 음식, 신선도가 떨어지는 음식,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음식, 급하게 먹은 음식, 멀쩡한 음식, 심지어 아무것도 안 먹은 날에도 이유 없이 대장의 발란스가 무너져 장이 자극을 받는다. 식사를 잘 마치고 나서 어둠의 기운이 느껴지면 일단 가까운 곳에 괜찮은 화장실이 있는지 살핀다. 대체로 식사 후 한 시간 이내에 반응이 나타나는데, 배에서 돼지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일을 치를 준비를 하라는 신호이다.
생각해보면 20대에 생긴 지병이다. 때문에 성인이 되고 나서 입에 대기 시작한 음식 중에 원인을 찾아보려고 했다.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고, 술을 먹기 시작했다. 생선회를 먹은 것도, 삼겹살을 먹은 것도 모두 성인이 된 이후부터였다. 무엇 하나를 콕 집어 주범으로 몰아가기에는 20대를 함께한 음식들이 너무 많다.
안타깝게도 배탈은 주로 광역버스에서 스멀스멀 올라온다. 경기도에 살았던 나는 학생 시절에도 직장인 시절에도 늘 광역버스를 타고 다녔다. 집에서 버스로 대략 한 시간 이내에 서울에 도착한다. 그런데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이 짧은 아침 시간에 꼭 일이 터진다. 버스를 타기 전까지 멀쩡하던 뱃속에서 꾸르륵 소리가 나는 것이 주의 단계이다. 꾸르륵거리다가 조용히 사그라드는 경우도 있으므로 약한 신호인지 강한 신호인지 알아차리기 위해 배 쪽에 감각을 집중한다. 불편감이 사그라들면 다행인데 증상이 심각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경계할 단계에 왔음을 의미한다. 이때가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타이밍이다.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전 빠르게 내려서 상황을 해결할 것인가(회사 지각), 아니면 힘들어도 최대한 참고 목적지에 내려서 해결할 것인가(9시 커트라인) 결정을 내려야 한다.
타이밍을 놓친 다음부터는 당장 화장실로 달려가고 싶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다시 견딜만한 상태로 돌아오는 웨이브가 반복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간격이 짧아지고 강도가 세진다. 집중력이 최고로 상승하고 식은땀이 흐르고 후회를 시작한다. '힘들어지기 전에 미리 내릴걸 왜 버티려고 했냐 이 미련퉁아...' 하고 내가 나를 나무란다.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온갖 신에게 기도하며 괄약근에 기운을 모은다. 그렇게 극한의 상황을 이를 악물고 버티다 버스가 어느새 고속도로에서 빠져나간다. 일단 아무 정류장에 내려 닥치는 대로 건물 화장실을 찾아 들어간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배탈과 함께 지옥과 천국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생리 현상 하나 통제하지 못하는 나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무력감에 빠진다. 그러다가 무작정 찾아 들어간 건물에서 휴지가 갖춰진 개방형 화장실을 만나면 그 상황이 사무치게 감사해서 어깨가 들썩인다. 추운 겨울에 볼일을 보고 나와 손을 씻는데 온수까지 나와준다면 너무 고마워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다. 이런 날은 불편한 대장과 감정의 기복을 추스르며 험난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결혼해서 서울에 집을 얻고 가장 기뻤던 것은 광역버스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버스 좌석에 앉아서 부족한 잠을 채우며 쾌적하게 출근하는 대신 사람으로 빽빽해 산소마저 부족한 2호선을 타고 출근해도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몇 분에 한 번씩 지하철 문이 열리니 배탈이 나도 언제든 걸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삶의 질을 높여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성인이 된 이후 가장 장의 스트레스가 없던 시절은 지하철을 타고 사람들 틈에 납작하게 끼어 출근을 하던 몇 년간이었다.
예전에 비해 급성 장염의 빈도가 많이 줄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을 알기 때문에 과식하지 않고 기름진 음식을 피하고 유산균도 챙겨 먹는다. 자주 다니는 상가 건물의 화장실 비밀번호는 구글 keep에 저장해둔다. 나에게는 로그인 패스워드나 은행 계좌번호에 버금가게 중요한 정보다. 장이 안 좋을 때 찾아가서 고민 상담을 하는 동네 병원 의사 선생님은 최근에 대변 이식술의 성공률이 높아지고 있다며 파이팅을 외쳐주신다.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기 직전까지, 멘탈이 무너지는 상황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아슬아슬함을 느낄 때마다, 웃기지만 내 옆에서 악마인지 천사인지가 귓속말로 약을 올린다. '그것 봐, 내가 뭐라 그랬어, 작은 것에도 쉽게 무너지는 인간아, 교만하지 말고 살으란 말이다.' 하는 환청이 들린다. 화장실에서 급한 불을 끄고 나올 때마다 들리는 속삭임이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것에 관대하고 겸손하고 누구든 끌어안을 수 있는 테레사의 마음이 된다. 이런 날의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남의 실수에도 얼마든지 너그러운 인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