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대리동동과의 첫 만남
사촌동생을 육지로 보내고 홀로 평대리로 향했다. 묵직한 캐리어를 이끌고 힘겹게 버스에 올랐다. 함덕에서 김녕을 지나 한동리를 지나 평대리로 구불구불 넘어갔다. 중간에 월정리를 거칠 때에는 사각형의 밭을 따라 돌담이 늘어선 모습이 가장 제주다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풍경을 더 감상하고 싶어서 다음엔 월정리에 숙소를 잡을까 하는 마음에 눈을 크게 뜨고 응시했다. 식당이 보이지 않아서 숙소를 잡아도 괜찮으려나. 제주는 모든 공간에서 다음을 기대하고 다짐하게 만든다. 한 번의 여행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곳곳에 어려 있다.
평대리에 도착하고 보니, 월정리에서 보고 감탄했던 제주다운 풍경이 더 넓게 펼쳐져 있었다. 현무암을 낮게 쌓은 돌담이격자로 지나가며 무밭과 당근밭을 가르는 곳. 내가 도착한 곳은 평대리 동동이었다. 큼지막한 바위에 ‘평대리동동’이라고 쓰여 있는 동글동글한 문구가 귀여웠다. 지나는 사람 없는 한적한 동네였다.
캐리어를 굴리며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인기 많은 곳이라서 고른 건 절대 아닌데, 깔끔하고 모던한 건물과 센스 있고 따뜻한 인테리어가 눈길이 갔었다. 오후 4시경, 입실 시간이 오후 5시인 줄도 모르고 도착했다. 조용한 시골 마을은 오후 한낮도 적막했다. 손님 한 명 없던 게스트하우스도 마찬가지였다. 글을 쓰거나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거나 혼자 하기로 마음 먹은 일들은 많았지만, 아무도 없는 건물 안에서 오후의 햇살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저녁을 먹으러 나갈까, 생각이 드니 여기가 시골 마을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둑어둑해지는 순간 유독 을씨년스러워지는 시골길. 해가 저물기 전에 저녁을 먹고 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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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은 널찍한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야 했다. 나를 빠르게 지나치는 자동차들은 많았지만, 보행자는 나뿐이었다. 왠지 모를 쓸쓸함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 괜스레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해가 저물기 전에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야 하니 마음도 살짝 조급하긴 했다. 하지만 한라산 등반으로 인해 살짝 손상된 무릎과 발목이 비명을 지르는 덕분에 속도를 평소만큼, 서울에 있을 때만큼 높일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속도를 늦추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평소대로 걸으면 무슨 소용인가. 형체도 없는 두려운 마음을 덮으려 애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름다운 제주 시골 마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인데도 밭은 초록빛으로 가득했고, 밭을 두른 돌담의 거뭇거뭇한 색감이 푸른 하늘과 어우러졌다.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보였다.
우리는 목적에 쉽게 매몰되는 나머지, 주변을 둘러볼 줄을 모른다. 내 목적지는 평대리에 위치한 어느 식당이었고 그 식당에 열심히 가는 것만이 내가 움직이는 이유였는데, 주변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걷다 멈추고 사진을 찍었고, 다시 걷다 또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그 해안도로에는 심은 지 얼마 안 된 동백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아직 나만큼도 크지 못한 어린 동백이었다. 이따금씩 꽃을 일찍 피워낸 나무들이 보였다. 제주는 가로수도 동백이구나. 생각해보니 감귤에, 야자수에, 동백에, 제주를 상징하는 꽃과 나무들이 많았다. 돌담이 늘어선 초록빛 밭과 중간중간 작은 집이 놓여있는 호젓한 마을 정경. 결국 내 기억에 남는 것은 평대리 식당에 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가는 길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일 것이다. 항상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만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이동의 정의였는데. 여유란 주변을 둘러볼 줄 아는 느긋함이란 뜻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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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저녁식사는 간장에 절인 딱새우회와 아보카도와 명란젓에 여러 야채를 곁들여 먹는 덮밥이었다. 여기서도 나 혼자뿐이었다. 식당은 커다란 거울과 빨간 의자가 눈에 띄는 곳이었다.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창가 한 켠에 늦은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구름 사이로 비치는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옆에 있는 의자에 가방과 편의점에서 사온 간식들을 올려두려다가 옆 자리에 가방 두지 말라는 메모를 보고 바닥에 슬쩍 내려두었다. 손님도 없었는데, 왠지 단호해보이는 필체에 군말 없이 따르기로 했다. 여행에서는 나의 소심함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들이 많다. 손님이 없으니 옆 자리에 짐을 두지 말라는 쪽지 정도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재량 하나도 쉽지 않았고, 식탁 아래 콘센트에 덮개가 덮여있으니 선뜻 휴대폰을 충전할 수가 없었다. 배터리는 20%를 향해가고 있었고, 나는 해가 저물까봐 조급한 마음인데도 그 덮개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결국 나는 사장님께 충전해도 되냐고 물어보고 나서야 마음 놓고 충전했다. 이 편이 서로에게 확실하고 예의를 지키는 방법이라는 생각도 들지만(일본에서는 전기도둑이라 불린다는 걸 듣고 나서 더 신경 쓰이는 참이다.), 짐 두고 충전하는 사소한 것에 마음을 많이 쓰는 나의 소심함이 그다지 반갑지는 않다. 혼자 있으니 내 성격이 더 두드러진다. 내 성격으로 빚어지는 선택과 그 결말들이 하나둘씩 떠오를수록 나는 여행의 모든 순간에서 나를 발견하게 된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식당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으니 식전빵이 나왔다. 뻣뻣하지 않고 부드러웠고, 은은한 버터향이 향기로웠다. 발사믹 식초가 뿌려진 올리브오일에 묻혀 먹자니 금방 식욕이 솟구쳐서 금방 해치워버렸다. 그리고 금방 등장한 딱새우덮밥. 딱새우 살을 어떻게 빼내야 잘 빼낼 수 있는지 배웠다. 집게와 가위로 새우살을 쏙쏙 빼내는 쾌감이란! 이 또한 해산물을 사랑하는 내 취향의 결말이었다. 행복한 식사.
그릇을 비워갈수록 해가 붉게 퍼졌다. 석양을 감상하기도 잠시, 조급함이 앞선다.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돌아가야 할 텐데. 평대리 해 지는 시각을 검색했다. 오후 6시 4분. 그때 시각이 5시 44분이었을 거다. 15분 만에 덮밥을 다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조급해졌다. 오후 6시 4분 하면 해가 땡,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조급해했을까. 혼자 하는 여행에서 느낀 것 중에 하나가, 나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생각보다 불필요하게 조급해한다는 사실이다. 한라산에서 내려와 영실매표소에서 제주시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승객이 몰려들어와 일행과 떨어졌는데, 그때도 버스에서 내리기 전까지 전전긍긍했다. 혹시나 일행과 엇갈리게 될까봐. 그래봤자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데, 만나면 그만인 것을.
조급한 마음을 끌어안고 꼭꼭 씹어가며 딱새우덮밥을 삼켰다. 그 와중에 맛은 충분히 음미했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생각해보니 다른 손님이 없어서 그 어떤 시선에도 신경을 기울이지 않고 나 혼자만의 식사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평대리로 여행지를 선택한 것은 아주 탁월했다. 특히 이번 여행이 나와의 대화이자 사색이 목적인 걸 고려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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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한 명 없는 밭길을 돌담 따라 걸었다. 너무 조용해서 해가 저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아직 위안이라기보다 두려움이다. 난 혼자일 때 가장 나약한 사람이다.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오늘은 통화소리로 그 적막을 채웠지만, 다음엔 내 걸음이 스치는 소리로 채워보겠다 다짐했다. 그래도 해가 저무는 풍경만큼은 오감을 채웠다. 바람이 차서 손이 시려웠지만, 태양은 아주 따뜻한 빛으로 하늘을 물들였다. 낮은 건물들로 채워진 시골 마을이 점차 어두운 색으로 덧칠되고, 듬성듬성 전구 빛이 밝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늘, 해 지는 시간이 6시 4분이라고 해도 실제로 어두워지는 때는 그보다 30분 정도는 늦은 때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내일은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야지.
서둘러 되돌아온 게스트하우스는 아직 조용했다. 저녁 6시 30분 정도면 한창 저녁 먹고 밤바다 풍경을 보러 돌아다닐 시간이지. 나도 사촌동생과 함께였을 때는 밤 열두 시까지도 거리를 활보했었다. 하지만 나는 혼자였다. 내가 유독 겁이 많은 것일 수도 있지만, 가로등 없는 어둡고 한적한 시골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을 용기가 없었다. 골목 어딘가에서 살고 있던 개들은 낮에도 거칠게 짖었었는데. 심지어 환한 낮에도 혼자라는 이유로 괜한 두려움을 억누르지 못했었는데.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혼자 여행하는 걸 무서워한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당연했다. 처음이니까, 무서울 수 있다고. 혼자 여러 번 여행하고 나면 이제 대낮에 혼자 길을 걸어가는 것 정도는 씩씩하게 넘길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혼자 중얼거리며 걸으니까 용기가 싹트기도 하더라. 처음에는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할까 한탄하며 걸었다가, 나중에는 그래도 내가 강인했었고, 강인하고, 강인할 순간들을 생각하며 강인해져보겠다고 눈을 부릅뜨고 걷다 보니 왠지 강인해지는 듯했다. 내가 무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바라보니까 오히려 강인해져야겠다는 다짐도 뚜렷하게 굳힐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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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까지 마치고 침대에 들어온 시각은 오후 7시 30분. 새벽 서너 시까지 시간을 쓰던 내게는 매우 드물고 놀라운 일이다. 엊그제 등반으로 무리하고 어제오늘 찬바람을 많이 쐰 탓에 머리가 묵직한 것도 이유였다. 그리고 할 일도 많았다. 일기도 써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고, 글도 써야 했으니까.
바깥에는 공용공간에서 게스트끼리 어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저기에 끼어있을 것이다. 약간의 환멸을 끌어안고. 여행하러 와서 좀 더 내게 이로운 방향으로 시간을 쓰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환멸이다. 그리고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지금은 무리로부터 동떨어진 것 같은 기분을 조금씩 끌어안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지금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낀다.
나는 INFP가 되기를 두려워하는 ENFP였는데, 요즘에는 내가 지금보다 좀 더 내향적인 사람이 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향성이란 조금 더 나이가 들어가면서 스스로를 지그시 바라볼 줄 알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대답을 찾아갈 수 있는 신중함을 얻는 것 같다. 그동안 외향적인 성격만이 멋지고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놓쳤던 나와의 시간을 이제는 찾아가려 한다. 혼자 있다 보면 이런저런 방향으로 생각이 튀던데, 그걸 가만히 바라보면서 내 인생의 여러 단면들을 돌이켜보게 된다. 혼자서 여행하는 건 오늘로 둘째날인데, 제주 여행의 목적을 아주 잘 이행해내고 있음에 흐뭇하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다른 사람들이 뭘 하든 나는 나에게 집중하겠다는 내 목표를 떠올리고 내 속도 내 상황에 차분히 녹아든다. 나의 바깥보다 안에 집중하게 되는 것. 내일 아침에는 비건 식당에 가서 아점을 챙겨 먹고, 그 옆에 제주 풀무질에 가서 책 구경을 하고, 해녀박물관 구경을 했다가, 코인빨래방에서 빨래를 하고, 초밥을 먹었다가 귀가할 것이다.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