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지독한 코골이에 시달렸다. 이렇게 심각한 코골이는 처음이었다. 시끄러워도 규칙적이라면 잠에 들 법도 한데, 드르렁, 푸우, 컥컥을 오가는 변칙적인 코골이라 도무지 잠들 수가 없었다. 한 방에 네 명이서 같이 잤는데, 다른 누군가가 욕을 읊조리는 소리를 들었다. 결국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잠을 청했고, 노래에 집중하려 애쓰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아침엔 일어나서 욕을 읊조렸던 그분과 마주쳤다. 함께 진저리를 치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나는 이틀 더 묵는데, 다행히도 코 고는 분은 금방 떠나시는 듯했다. 코골이 덕분에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생기 넘치는 분이었다.
어제 사온 과자와 소시지와 우유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한 덕에 비건 식당은 나중에 방문할 곳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자연스레 그 근처에 있던 풀무질도 미루게 되었다. 이제 나는 혜화 풀무질을 하루가 멀다 하고 지나가게 될 테니, 서울에서나 열심히 들러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혜화 풀무질이 이태원으로 훌쩍 떠나버렸다ㅠ) 대신 세화항을 지나 세화해변에서 어제에 이은 바다구경을 한 뒤, 해녀박물관에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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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두 해안도로에서 해녀 한 분을 만난 이후로 제주엔 해녀가 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콕 박혔다. 잠깐 검색해서 알게 된 내용으로는 해녀 문화가 1) 생태적이고, 2) 공동체적이며, 3) 제주를 먹여살린 강인한 여성이자 제주도민의 정체성이라는 것. 모두 현대 사회에서 까맣게 잊어버린 가치다. 기후변화와 불평등을 비롯한 여러 이슈를 듣다 보면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은 우리가 중요한 가치를 잊어버린 탓이다.
해녀의 삶이 궁금해졌는데, 마침 세화해변 근처에 해녀박물관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해녀박물관에 방문한 것은 굉장히 유익했고, 뿌듯했다. 해녀가 사용하는 옷과 도구부터 해녀의 일생, 해녀의 역사까지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었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가사와 경제활동을 모두 책임졌던 해녀의 삶이다. 차갑고 거친 바다에 몸을 담그며 일하는 것만으로도 고달펐을 텐데, 살림살이까지 도맡았다면 하루하루가 바삐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집 안팎의 일을 스스로의 힘으로 꿋꿋하게 해낸 그들의 일생이 존경스러웠다. 그 책임감, 강인함, 우리가 항상 기대하는 멋진 여성상이 아닌가…
해녀는 욕심 부리지 않는다고 들었다. 잡을 수 있을 만큼만, 그리고 공존할 수 있을 만큼만. 현대 사회를 반성하게 되는 방식이다. 우리는 끝없는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확장과 팽창을 멈추지 않고 있지 않나. 먹을 만큼만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이 생산해서 남기고 버린다. 과잉으로 치닫는 세상을 과연 멈출 수나 있을까. 해녀의 정신이 오랫동안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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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화리와 하도리 해변을 걸으며 오랫동안 바다로 시선을 던졌다. 하도리 해안도로에는 사람이 없어서 나 혼자 보행자였는데, 그래서 괜히 울타리 없는 바닷길로는 향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서 나를 밀쳐버리면 어떡해. 이렇게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맑은 날에 바다에 퐁당 빠지고 싶진 않았다. 혹시 모르니까. 나 중증일까? 길가에는 날 빼곤 아무도 없었는데. 내 삶은 기우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쓸데없는 걱정만 잔뜩하니 조급해하며 시간을 보내지.
걷다 보니 바람이 너무 세고, 슬슬 다리도 아팠다. 게다가 내가 오늘 가기로 마음 먹었던 곳은 세화인데 하도리까지 가자니 마음이 잡히질 않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카페에 앉아서 할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오는 길에 한산한 카페도 보아두었다. 당근주스를 먹을까 했는데, 무려 8천원이라 따뜻한 캐모마일 차를 마시기로 했다. 물가가 올라도 너무 올랐다 하는 한탄 섞인 혼잣말을 떠올리고, 내 식비 예산은 하루 3만원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한다. 아까 점심에 먹은 문어해물라면이 만 원짜리였고, 저녁에 먹고 싶은 모듬초밥이 만사천 원이니까, 내겐 6천원의 여유밖에 없다. 캐모마일 차는 오천오백 원이었다. 근데 지금 케이크를 굽는 고소한 냄새 때문에 케이크를 먹고 싶다는 충동이 자꾸만 고개를 든다. 냄새 마케팅이 이래서 지나치다. 너무 유혹적이다.
… 그리고 결국 먹어버렸는데, 정말정말 맛있었다. 냄새로 음식이 당기면 막상 맛을 보고 실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당근케이크는 내가 냄새로 기대한 맛 이상이었다. 당근과 견과류가 어우러진 담백한 시트에 크림치즈가 조화로웠다. 한 입 먹고 세화해변 바라보고, 한 입 먹고 돌담 바라보며 육천 원의 효용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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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장소를 둘러보지는 못하지만, 뚜벅이라 가능한 여행의 속도가 있다. 발걸음 하나씩 느릿하게 쌓여가면 채워지는 여행의 경로들. 도시의 걸음보다 훨씬 느린 속도인데, 그마저도 걷다가 자꾸만 멈춰서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거리마다 같은 듯 다른 돌담과 위로 뻗은 나무들. 바다. 하늘. 수직으로 뻗은 돛대를 달고 바다 위에서 둥실거리는 하얗고 빨간 통통배들. 제주의 바다는 다섯 가지 파랑이 있다더니, 정말이었다. 연한 하늘부터 쪽빛까지 모두 바다에 담겨 있었다. 모두 차로 움직인다면 한순간 눈에 담고 지나쳐버릴 풍경들이다. 걷고 있기에 눈에 오래 담고 지그시 바라보게 된다.
좋아하는 밴드의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바다를 걷는 시간이 행복했다.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 그리고 오랫동안 좋아한 밴드의 반가운 멜로디. 이 순간이 기억에 박제되는 걸 느꼈다. 아마 오랫동안 떠올릴 테지. 이 밴드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제주의 파랑이 눈앞에 펼쳐지겠지. 여행에 노래와 냄새를 덧입히면,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같은 냄새를 맡을 때마다 여행의 조각을 끄집어낼 수 있다. 여행은 감각하는 것이다. 아마도 느리기에 가능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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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조속히 귀가하기 위해 서둘렀다. 빨래를 해야 해서 코인빨래방에 들렀는데, 세탁기가 약속한 시간을 안 지켜서 마음이 바빴다. 주변을 경계하며 겨우겨우 빨래를 마무리했고, 어둑어둑해져가는 거리를 따라 빠르게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갔다.
게스트하우스는 여전히 조용했다. 다들 늦게까지 밖에 머무르다 들어오나 보다. 부엌에서 혼자 초밥을 맛있게(!) 먹었고,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 FKJ 노래를 감상하며 책을 읽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홀로 조용한 사람이 되어보면서 느낀 것은 나는 내가 바라보는 나보다 타인이 바라보는 나를 더 신경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때로는 우유부단하고, 때로는 소심하고, 때로는 멍청한 나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시크한 표정을 덧씌운다. 첫인상만큼은 당당하고 멋진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에. 그런데 내가 표정을 일부러 가공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나는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낀다. 나에게 집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도 날 쳐다보고 있지 않은데, 나는 마음 속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누군가를 그려놓고 항상 시선을 받고 있다고 여긴다. 마치 코난에 나오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범죄자처럼 검은 형체의 누군가가 날 따라다니고 있는 듯하다. 자동차가 지나가면 차창으로 날 내다보고 있을 누군가를 상상하고, 자동차 안에 있으면 차창 안을 살피고 있을 보행자를 상상한다. 그리고 어색해한다. 아무도 없는데. 정말 내놓기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가끔은 내가 설정한 미확인 사람 때문에 표정도 몸짓도 어색해지곤 한다. 그러다 보면 그 순간 내가 온전히 느끼고 있는 감각은 뒷전이 된다.
그래도 오늘은 내가 바다로 시선을 던지는 일에 적당한 무게를 쏟았던 것 같다. 홀로 하는 여행에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