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책이었지만 문제의식이 워낙에 선명해서, 책을 완벽히 소화하지 못해도 충분히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분명하다. 자본주의야말로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가장 본질적 문제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냉정한 진단
이 책의 핵심은 확장과 연결이다. 먼저 자본주의가 경제적 개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짚어주며 경제적 측면 바깥으로 관점을 확장한다. 우리가 직면한 노동 구조의 불합리한 문제, 과도하게 기울어진 돌봄 문제, 도무지 제동할 수 없는 생태 문제, 민주주의가 퇴색되어 가는 정치적 문제 모두 자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저자는 각 문제를 자본주의와 연결지어 개별적으로 문제를 바라보던 좁은 시야를 매우 거대하게 확장해주었다.
읽으면서 시원함이 있었다. 이런 단적인 비판에 목말라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자본주의에 묶여 사는 삶이라며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도 옹호하지도 못하고 모호한 태도를 취하기만 했다. 자본주의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것이 순진하지 않고 현실적인 태도일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이 책은 어렴풋이 알면서도 명확히 붙잡지 않았던 문제의식을 선명히 보여주었고, 냉정한 판단 속으로 나를 데려갔다.
가장 인상 깊었던 깨달음은 노동자의 구분이었다. 저자는 두 종류의 노동자가 있음을 지적했다.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노동자와, 권리를 박탈 당하고 수탈 당하는 노동자다. 후자의 수탈이 있기에 전자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지적은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폐해를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했다. 읽으면서 콜탄 광산의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이런 노동자의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이 아님에도 다르게 느껴졌다. 나의 생활은 이들의 고생 위에 있었다. 세상은 의심할 수 없이 부조리한 구조로 세워져 있었다. 그래도 괜찮고, 그래도 살 만하다는 어떤 순진한 착각도 부수는 책이었다.
하지만 부작용이 있었다. 독서모임에서 우리는 무력감을 토로했다. 노동, 돌봄, 생태, 정치… 개별적인 문제를 마주쳤을 때에도 변화의 가능성이 좀처럼 보이지 않아 어렵게 느껴졌는데, 그 모두를 연결하고 조장하며 위에서 거대하게 군림하는 악당의 실체를 만나니 희망과 의지가 짓밟히는 기분이었다. 저자는 구조적 변혁을 강조했지만, 구조를 바꾸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대안의 고민과 비관의 극복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구조의 문제라는 명제는 낯설지 않다. 물론 노동, 돌봄, 생태의 위기를 자본주의와 연결시켜 총체적으로 분석한 적은 없지만, 현대에 나타나는 사회 문제가 하나의 개인, 하나의 기업, 하나의 정부를 초월하는 거대한 문제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늘 마주치는 장벽은 구조를 어떻게 바꾸냐는 것이다. 이 책은 문제를 정확히 꿰뚫어보는 시각을 알려주었지만, 그 다음을 알려주지 않는다.
페미니즘 운동, 생태주의 운동, 노동 운동,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운동이 모두 연결되어 하고, 다수가 참여하는 공론을 지향하는 등 저자가 제시한 방안에 너무도 공감하고 필요성을 느끼지만, 이마저도 가능해보이지 않았다. 끝없는 비관이 이어졌다.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를 마음 속 깊이 내면화했다. 이 책을 읽고도 자본을 더 확보하려고 하는 나의 일상적 노력을 그만두지 않을/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자본주의는 거대한 동시에 내밀하기도 한 것이다. 사회의 구조가 먼저인지 개인의 욕망이 먼저인지 알 수 없지만, 세상은 오랫동안 이렇게 형성되었다. 회복과 개선을 위해 무언가 시작되어도 결국 자본주의적 이익에 무너질 것 같았다. 과연 진정한 반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운동이 가능할까? 과연 사회의 새로운 형태가 가능할까?
예진은 그래도 우리가 비관에 빠지면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그 무력과 비관 또한 구조의 일부일 것이라고. 독서모임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희진은 현대 사회가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 모여 나타난 결론이므로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기 어렵다고 했고, 수민은 모든 게 무너지고 재건하는 것만이 가능할 것 같다고도 했다. 현진은 타임달러라는 개념을 소개해주었다. 타임달러는 지역화폐제도인데, 자원봉사 시간을 화폐처럼 사용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타임달러를 벌었다면, 그 타임달러로 또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웹툰 <카야>에서 보았던 공동 육아 시스템을 떠올렸다. <카야>에 등장한 어떤 외계 종족은 아이가 태어나면 육아를 담당한 인력이 함께 아이를 기르고 키웠다. 누군가는 고민하고 제시하고 시도해보고 있었다. 우리는 비관에서부터 빠져나오기로 했다.
구조적 변혁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인식의 전환이지 않을까. 인식에서부터 라이프스타일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라이프스타일이 변화했을 때 사회의 제도적 변화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과도한 육식을 지양하고자 하는 사람 중에는 물건을 함부로 쓰고 버리는 사람이 드물 거라는 기대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아주 작은 일부터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답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작게 시작하는 것이 비관을 극복하는 법일지도 모른다.
‘좌파의 길’은 적절한 제목인가
마지막으로 책이 번역되면서 바뀐 제목에 질문을 던지고 싶다. 저자가 명시한 원제는 ‘Cannibal capitalism'으로, 식인 자본주의를 가리킨다. 이 개념은 저자가 강조하는 자본주의의 식인적 특징, 번역에 따르면 ‘제 살 깎아먹는' 특징을 설명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바뀐 제목은 ‘좌파의 길'이다. 급진적 변혁을 요구하는 만큼 틀린 설명은 아니겠으나, 저자가 지적하는 자본주의의 중요한 핵심이 가려졌다. 더불어 이렇게 중요한 문제의식을 담은 책에 ‘좌파'라는 이분법적인 정치 경향이 덧입혀지면서 중요한 문제의식을 담은 책이 오해를 받을까봐,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지 못할까봐 우려된다. 꼭 ‘좌파'라는 제목을 사용해야 했을까?
왜 좌파의 길이라고 했는지 이유는 알겠다. 저자는 마지막에 사회주의에 대한 확장된 시각을 설명하면서 좌파정치가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 제시한다. 현 체제를 개혁하고자 한다면 대항해야 하는 대상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여야 한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희진은 좌우의 개념이 어떻게 구분되기 시작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국민의회에서 ‘평등’을 중시하는 진영이 왼쪽에, ‘자유’를 중시하던 진영이 오른쪽에 앉은 것에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차별과 배제와 착취를 비판하는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좌파의 길이 맞았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독자를 한정하는 제목일까 싶어 아쉬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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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더 확장된 개념으로 바라보는 순간 세상을 더 구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떤 개념의 정의와 범위를 단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구 위의 모든 것들은 연결되어 있다. 그 복잡한 연결 위에 삶이 있고, 사회가 있고, 세상이 있다. 이 연결을 고려했을 때, 구분을 극복했을 때, 유의미한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단절된 존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