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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zoos Jun 01. 2023

언젠가의 크리스마스

눈이 펑펑 내리는 크리스마스였다. 건너 편에 앉아있던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내일 같이 영화 보러 갈래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멍~ 한 느낌 이었달까, 뭔가 장소와 상황에 맞지 않는 돌직구였다.


"어... 어... 그래요..."


찰나(刹那)의 순간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머릿 속을 훑고 지나갈 수 있는 지 알게 된 경험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다양한 대답과 행동의 경우를 계산했고 결론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눈이 펑펑 내렸다.


저녁을 먹을 때까지, 다같이 술을 마실 때까지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각자 자기를 소개하고 당연한 어색함이 끝나고 슬슬 서로에 대해 익숙해지고 있을 즈음, 어색하기만 했던 참가자들 사이에 알 수 없는 눈빛이 오가면서 기약없는 다음 번 모임을 얘기할 때, 그 때 즈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였다.


평소 같으면 참석하지 않았을, 좀 특이한 모임이었다. 크리스마스를 홀로 보내는 솔로들의 모임. 솔직히 말해서 5:5로 남녀 성비를 맞추겠다는 주최자의 호언장담에 흥미가 끌리기도 했지만,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새로 지은 고층 아파트에서 파티를 한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친한 친구와 함께 참석하겠다는 신청을 하면서 '이 동네 아파트 너무 좋을 것 같지 않냐. 경치 짱일 듯!' '뭐 별 일 있겠어, 그냥 술이나 먹고 경치나 보고 오자~' 같은 마음이었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모임에 늦지 않게 도착해서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메리 크리스마스~" 라는 건배를 나누며 샴페인을 마실 때까지, 별 생각이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뷰, 거실, 식탁, 식기 그리고 꽤 격식을 차린 음식이 나오고 나서야 '주최자가 꽤나 신경 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경치 구경하러 온 거였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디저트가 나오기 전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폭탄같은 제안을 던진 건.


"오빠, 내일 같이 영화 보러 가요."


뭐랄까, 크리스마스 이브에 솔로인 남녀 다섯 쌍이 모였으니 사실 이건 '미팅' 같은 거였다. 겨우 호구조사를 마치고 취미 정도를 물어보는 대화가 적절한 분위기였는데, 그녀는 룰을 깨고 나에게 말을 던진 거다.


"이 사람은 내가 찜했으니까, 니들은 건들지 마!"


라고 들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흐름과 룰을 깨부순 제안. 어안이 벙벙한 채로, 처음 그녀를 제대로 살펴봤다.


작은 키의 왜소한 몸집, 긴 머리에 굵은 웨이브, 반짝이는 눈망울에 굵고 짙은 눈썹. 눈썹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던진 '흐름과 상관없는' 제안 때문이었을까? 의지가 강해 보이고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성격으로 보였다.


"네, 그래요. 무슨 영화 볼까요?"


사실 그녀는 나에게 'NO!'라고 대답할 수 없는 타이밍에 그렇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같이 보러 가자~'는 정도의 물타기(?)였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에 꽤나 많은 계산이 끝났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어디까지 가는 지 가보자는 게 내 생각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


아, 이 다음은 떠오르질 않네.

실화냐고?

글쎄...




from 2019.04.13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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