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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행

창업 92년, 노포의 향토요리

2025 생일맞이 가고시마 여행 #18 - 산에이

by zzoos




이번 여행의 이유랄까요 원인이랄까요. 아니면 화두라고 할까요? 이번에 여행을 출발한 이유는 '생일'이었습니다. 생일날 집에서 쓸쓸하게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았거든요. 여행하는 도중에 혼자 맞이하는 생일은 그것대로 낭만이 있지만, 집에서 혼자 맞이하는 생일은 쓸쓸함 외에 다른 감정이 들어올 자리가 없잖아요.


바로 오늘이, 제 생일입니다.


호텔에 체크인하자마자 한 일이 오늘의 식당을 예약하는 것이었어요. 오늘의 식당을 고르는 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꽤나 정성껏 식당을 검색하고, 리뷰를 읽어보고, 사진을 확인했어요.


가고시마에서 타베로그의 평점이 높은 순으로 모든 가게를 정렬해 보면 최상위의 가게들은 스시야들이더라고요. 역시 신선하고 풍부한 해산물이 있는 도시 답습니다. 하지만 저는 스시만 먹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가고시마에서만 먹을 수 있는 요리를 내는 곳을 찾았어요.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 옆 골목으로 들어오면 보이는 산에이




1933년에 창업했다고 하니 올해로 정확하게 창업한 지 92년 된 가게인 산에이(山映)입니다. 지금은 2대째와 3대째가 함께 운영을 하고 계신 것 같아요. 가고시마의 향토 요리를 만드는 곳입니다. 저는 가장 인기가 많은 코스 요리로 저녁을 예약했습니다. 기대가 컸어요. 그동안 먹어보지 못한 가고시마의 향토 요리를 맛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말이죠.




최근 유행 중인가? 싶은 GLOW EP05




자리에 앉아서 안주인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소다와리로 마실 쇼츄를 하나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GLOW EP05를 추천해 주셨어요. 확실히 마시기 편안한 쇼츄입니다. 소다와리로 마셨을 때 멜론향이 피어오르는 카오리계 쇼츄예요.




1. Amazake
2. Fig tofu dressing
3. Appetizer plate
- Nanbanzuke, Okura
- Eel Siraae, Karasumi power
- Grilled sea bream sesame dressing
- Grilled tofu with Jsansho miso
- Sweet potato Chestnut Ginko nut
- (혼마구로로 만들었다는 젤리가 추가됨)
4. Sake sushi
5. Shuto Takaebi caviar
6. Kibinago
7. Sashimi
8. Sea bream soup (자연산 송이버섯이 추가되어 뭔가 다른 수프가 됨)
9. (도미와 송이를 뭔 소스에 굽고, 카라스미를 곁들인 요리가 추가됨)
10. Kurobuta tonkotsu
11. Satsuma-age Vegetable tempura
12. A5 Kuroge-wagyu shabushabu
13. Porridge sea bream broth
14. Melon
15. One bit Dorayaki
- redbean paste, organic matcha jerry
16. Mame-gashi
17. Sencha (first flush from Shinbushi)




한잔 마시면서 오늘의 코스를 살펴봅니다. 영어로 적혀 있네요. 미리 스포 하자면, 메뉴에 적혀 있지 않은 요리들도 추가됐어요. 주방장님이 미리 정해둔 메뉴를 제대로 보지 않고 맘대로 더 만드셨다고 하네요. 저야 좋죠. (미리 말하자면, 결국 배가 불러서 밥과 국도 생략하고, 디저트도 대폭 간략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긴 했습니다)




아마자케, 무화과 그리고 애피타이저 플레이트




아마자케(甘酒), 무화과 두부 드레싱 그리고 애피타이저 플레이트가 나왔습니다.


아마자케는 식혜와 비슷한 일본의 음료입니다. 기분 좋은 단맛이 고급스러웠습니다.


드레싱이 덮여 있는 동그란 녀석은 처음에 뭔지 몰랐어요. 반을 가르니 무화과더군요. 이게 너무 맛있어서 식사 전체에 대한 기대감이 확 올라갔습니다. 무화과의 식감도 좋은데 거기에 부드러운 두부 드레싱의 조화가 참 좋았더랬습니다.




뭔가? 하고 반을 갈라보니 무화과였다.




애피타이저 플레이트에는 총 6개의 요리가 놓여 있습니다. 메뉴에는 5종이었지만 주방장님이 하나 더 만드셨다고 해요. 왼쪽 위의 것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아지(전갱이) 난반즈케와 오크라, 살짝 구운 도미살 위에 참깨 소스, 삶은 밤과 은행과 가고시마산 고구마, 미소를 발라 구운 두부, 카라스미 파우더를 뿌린 장어 시라아에(두부, 참깨와 함께 무치는 요리)가 놓여 있고요. 가운데에 주방장님이 추가로 만드신 요리가 놓여 있는데, 정확하게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설명해 주실 때 참치를 언급하긴 하셨어요. 참치 젤리 같은 거랄까.


애피타이저 플레이트도 하나같이 맛있었어요. 아지 난반에서 아지의 향이 삭~ 올라온다던가, 장어 시라아에의 부드럽고 아삭한 식감 속에서 마지막에 느껴지는 카라스미, 부드러운 두부 위에 바른 미소 소스에선 시소의 향이 탁 쳐주고, 바삭한 식감까지. 재료를 섬세하게 다루고, 정성을 들였다는 것이 드러나는 요리들이랄까요.




독특한 향이 특징인 가고시마의 향토요리, 사케즈시




다음은 가고시마의 향토요리인 사케즈시(酒ずし)라는 것이 나왔습니다.


커다란 항아리에 재료를 넣고 요리용 술을 부어서 시간을 두는 요리라고 합니다. 독특한 향이 나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해 주시네요. 밥과 버섯, 새우, 각종 향채, 몇 가지 종류의 생선들이 느껴집니다. 적당한 단맛과 산미가 나고 향채의 독특한 향이 그 위를 덮고 있어요. 재료의 맛들이 다 느껴지는 맛있는 요리였습니다.




슈토 타카에비 캐비어




슈토 타카에비 캐비어입니다. 슈토아에(酒盗和え)라고 가다랑어 내장 젓갈 무침을 가끔 안주로 먹곤 하잖아요? 바로 그 슈토(酒盗)입니다. 아주 신선한 가다랑어 내장 젓갈이에요. 사진으로도 그 신선함이 보이죠? 그 위에 타카에비(高エビ)와 캐비어를 올렸습니다.


타카에비가 참 맛있는 새우더군요. 그리고 신선한 슈토는 정말 술 도둑입니다. 헌데 그 밑에 있는 육수(?)는 아주 많이 짭니다. 역시 젓갈이에요. 그러니 슈토에 뭍은 짠 기운들을 잘 털어내고 먹었습니다.




가고시마 하면 떠오르는 은빛, 키비나고




다음은 키비나고 사시미(きびなご刺身)입니다. 아주 예쁘게 생겼죠. 가고시마 하면 떠오르는 장면 중의 하나입니다. 키비나고는 우리말로 샛줄멸인데요. 남쪽 지방에서는 꽃멸치라고도 부릅니다만, 실제로 멸치와는 종이 좀 다릅니다. 제주에서 '멜젓'을 만들 때 쓰는 게 멸치가 아니라 바로 이 샛줄멸이라고 알고 있어요.


어쨌든 키비나고 사시미는 너무 신선해서 그런 걸까요? 처음 느끼는 깔끔함입니다. 심지어 시원한 청량감이 느껴질 정도예요. 함께 내주신 시소채와 같이 먹으면 청량감이 극대화됩니다. 정말 매력적인 사시미!




마다이, 미즈이까, 혼마구로, 가츠오, 아와비




이제 사시미 모듬입니다. 마다이(참돔), 미즈이까(무늬오징어), 혼마구로(참다랑어), 가츠오(가다랑어), 아와비(전복)이네요. 산에이가 도미를 다루는 데 특별한 스킬이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정말로 도미가 이상하게 맛있습니다. 도미가 아주 상쾌한 맛이에요. 이건 무슨 비법이 있는 걸까요?




깔끔한 니혼슈, 나가사키의 HIRAN




니혼슈를 하나 추천 부탁드렸습니다. 아라마사나 쥬욘다이 같은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라마사가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헌데 오늘은 뭔가 새로운 걸 먹고 싶다고 했더니, 나가사키의 HIRAN(히란)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산뜻하고 맛있는 니혼슈였어요.




도미, 송이를 이용한 도빈무시. 스다치가 올려져 있다.




다음 요리는 도빈무시(土瓶蒸し). 메뉴판에는 도미 스프라고 쓰여 있는데, 좀 다르게 만드셨다고 합니다. 자연산 송이를 넣으셨데요. 오잉? 그럼 나한텐 더 좋은 거네?


주전자 안에는 수프가 들어 있고요, 작은 잔에 국물을 따라서 마시는 요리입니다. 뚜껑 위에 올려둔 스다치(すだち)를 이용해 산미를 직접 조절하라고 하시네요. 뚜껑을 열어서 안에 있는 내용물도 건져 먹습니다. 주전자 안에는 자연산 송이와 도미살 같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냄비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도 건져 먹는다.




이거 정말 맛있었습니다. 송이의 향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도미 베이스의 국물이 아주 깊습니다. 그리고 어떤 재료들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맛이나 향이 단순하지 않고 다채롭습니다. 마음에 쏙 드는 요리였어요.


이 즈음까지 먹었을 때, 벌서 두 시간이 흘러 있었습니다. 제가 좀 천천히 먹기도 했지만, 여주인과 수다를 좀 많이 떨었어요. 한국 요리를 추천해 달라고 해서 요즘 제가 좋아하는 냉제육을 추천해주기도 하고, 맛있는 가게들을 소개해주기도 했거든요. 드라마 얘기도 하고, 배우들 얘기도 하고,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먹었더니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흐르네요.




코스 예정에 없던 도미 요리




다음 요리는 아예 메뉴판에 안 적어둔 요리입니다. 주방장님이 나와서 설명해 주시네요. 아마도 2대째인 아버님이신 것 같습니다. 도미를 구우셨다고 하는데, 자연산 송이도 쓰셨다고 하고, 옆에는 카라스미도 놓여 있어요. 엄청나게 구수한 향들이 올라옵니다. 도대체 뭘로 어떻게 양념해서 구운 건지, 설명을 들어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대단한 맛의 조합입니다.




가고시마 전통 요리인 쿠로부타 돈코츠




이번엔 메뉴판에 있는 요리가 나왔습니다. 쿠로부타 돈코츠(黒豚豚骨)와 고야(여주) 볶음. 가고시마의 전통 요리라고 합니다. 제 생각에 이건 오키나와의 영향을 받은 요리가 아닐까 싶어요. 고야 찬푸르는 오키나와의 대표 요리잖아요. 그리고 돼지고기를 삶아 먹는 문화도 오키나와에 많이 발달해 있죠.


가고시마는 역사적으로 오키나와와도 관계가 깊다고 알고 있어요. 사츠마 번은 아마미 제도 같은 류큐 왕국의 일부를 먼저 자신들에게 편입시켰거든요. 그래서 류큐 왕국의 일부는 먼저 가고시마현이 되었고, 나머지 류큐왕국은 일본에 편입되면서 오키나와가 되었어요. 그러니 오키나와의 식문화도 가고시마에 영향을 줬을 겁니다.


잠깐 말이 다른 곳으로 샜는데요. 여튼 이 요리는 돼지고기를 쇼츄와 미소 등 양념에 숙성시킨 이후에 요리하는 거라고 합니다. 맛은 아주 한국적이에요. 부드럽게 잘라지는 간장조림 같은 맛입니다.




화이트 와인도 한 잔 합니다. 샤블리네요. 이 와인도 꽤 좋은 녀석이었어요.




플레인 사츠마아게, 렌콘 사츠마아게, 호박, 연근, 콩 껍질




사츠마아게와 야채튀김이 나왔습니다. 플레인 사츠마아게, 렌콘 사츠마아게, 호박, 연근, 콩 껍질

간장이나 소스를 안 주셔서 의아했는데, 소금간이 되어 있군요. 아, 이 집은 당연하게(?) 튀김도 잘하네요. 맛있습니다. 사츠마아게는 그동안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습니다.




핑크빛으로 잘 익은 고기와 소스. 쿠로게와규 샤부샤부.




이제 거의 끝나갑니다. 쿠로게와규(黒毛和牛) 샤부샤부.


제가 직접 샤부샤부하는 건 아니고 주방에서 살짝 익혀서 나오는 거군요. 핑크빛으로 잘 익힌 소고기 위에 소스를 뿌렸는데요. 고기를 들춰보니 그 안에 잘게 썰어둔 야채들이 가득합니다. 크기가 좀 커서 반으로 잘라서 먹었는데요. 이것도 너무 맛있습니다. 부드러운 건 둘째고 소스도 기가 막히고, 아주 살짝 피어오르는 기분 좋은 피 냄새와 육향이 신선해서 맛이 기가 막혀요. 입 안에서 맛이 폭발한달까요.




고기 아래엔 야채를 잘게 썰어두어 맛과 식감이 폭발




다음으로 나올 것이 흰쌀밥과 도미국이라고 해서 못 먹겠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나올 디저트도 좀 간략하게 달라고 했어요. 배가 너무 불렀거든요. 원래 입이 짧기도 한데 요리가 몇 개 추가로 나왔잖아요.




생일이라고 샴페인을 한 잔 주셨다.




끝까지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오늘이 제 생일이라는 얘기를 꺼냈어요. 그냥 '덕분에 너무 즐겁게 생일을 보낼 수 있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뿐이었는데, 안주인과 주방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아니 그걸 이제야 말하면 어떡하냐고 하더라고요. 미리 말했다면 뭔가 준비할 수 있었을 거라고. 그래서 그걸 하지 말라고 이제 얘기한 거라고 했지만, 샴페인을 두 잔 따라서 여주인과 건배했어요. 생일을 축하해 주시더라고요.




가고시마에서 맞이하는 혼자만의 생일




그러다가 갑자기 불이 꺼지길래, 뭐지? 했더니 아... 디저트 플레이트에 초를 하나 켜주셨습니다. 한입 도리야키 위에 켜주신 생일 촛불이라니요. 너무 감사했어요. 모든 직원이 모여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셨고, 저는 생일 촛불을 불어서 끌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건강하길, 이곳에 다시 올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정말로 만족한 식사였어요. 다음에도 기회가 된다면 또 방문하고 싶습니다. 아마 가고시마에 여행 갈 일이 생기면 예약을 잡기 위해 매번 노력할 것 같아요. 음식들이 너무 좋고, 사용하는 식자재들도 신선하다는 게 느껴지고요. 그 친절함도 기억에 제대로 남았습니다. 이번엔 술을 많이 못 마셨는데, 다음엔 제대로 쇼츄들과 페어링 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2025년의 생일은 그렇게 기억에 남는 생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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