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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거스트 Jun 23. 2024

아기를 함께 키워주는 사회

네덜란드 이야기


 아밀리(Amyleigh, 네덜란드 여성, 가명)는 삼십 대 초반의 프로그램 리더다. 프로그램 리더는 R&D 연구소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전략에 맞게 관리하고 임원진에게 보고하는 일을 한다.

 내가 아밀리를 처음 만난 건 지난 5월 사업부 대표가 된 직후였다. 아밀리는 내 사업부의 연구소 세 곳 중 하나의 프로그램 리더였는데, 이미 거의 만삭의 몸이라 그녀와의 만남은 Hello (안녕) 그리고 Good Bye (안녕)이었다. 작년 7월에 그녀는 6개월 동안의 출산 휴가를 갔고, 올해 1월이 되어서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아밀리는 연구소 소장이 신임하는 젊은 인재였다. 3개의 제품 카테고리를 하나로 묶어서 내가 맡은 사업부를 출범시키자, 나에게는 3명의 프로그램 리더가 생겼다. 네덜란드 두 곳과 홍콩에서 각자 도식하던 R&D 팀의 제품 개발을 하나로 묶어 사업부 단위에서 관리할 팀장이 필요해졌다. 자연스럽게 현재의 3명이 후보가 되었다.


 아밀리 외의 다른 두 명은 연구소에서 잔뼈가 굵고 업력을 쌓은 오십 대 후반, 사십 대 반의 남성이었다. 내 예상과 달리 연구소장은 가장 어리고 가장 경험이 적은 아밀리를 나에게 추천했다. 게다가 그녀는 곧 출산 휴가에 들어갈 판이었다.

 나는 이제 막 사업부 대표가 되었고, 다른 동료들과 달리 제품 개발 쪽 업무를 전혀 하지 않고 승진한 특이 케이스였다. 나에게는 경험 많은 조언자가 필요했다. 그런데 나이 어리고 경력이 적은 아밀리를 팀장으로 추천하다니.

 이유를 묻는 나에게 관록의 남성, 대머리 독설가인 그가 말했다. "내 직장 생활 동안 가장 보람 있는 일이 젊은 여성 인재를 키워내는 거였어. 확률은 반반이야. 내 판단력이 늘 옳은 건 아니었으니까. 아밀리는 한번 해보고 싶어. 네가 동의만 해준다면."

 나는 과연 이 시점에 이 선택이 옳은지 반신반의했지만 그의 취지가 마음에 들어서 잠시 후 흔쾌히 오케이를 했다. 서로 고생스럽겠지만, 나 또한 나에게 도박을 걸어준 몇몇의 리더들 덕분에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던가.


 아밀리가 돌아오고, 곧 인사발표가 났다. 아밀리는 현재 업무에 더불어 다른 2곳 연구소 프로그램 리더들의 팀장이 되었다. 세 리더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홍콩의 케니스(Kenneth, 홍콩 남성, 가명)가 곧이어 사표를 냈다. 8월 31일에 회사를 떠난다고 했다.

 나는 연구소장과 고민한 끝에 케니스의 후임자를 뽑지 않고 홍콩 연구소의 프로젝트를 아밀리가 추가로 도록 했다. 아밀리가 관리하는 프로젝트의 규모가 세 배로 커졌다.


 아밀리는 신속하게 케니스와 인수인계 플랜을 세운 후 나에게 두 번의 출장 계획을 알려왔다. 한 번은 6월 중순. 다른 한 번은 8월 후반. 6월 출장에 내가 동행해서 아밀리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지만 올해 시작부터 지금까지 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낸 터라 몸이 많이 지쳐있었다. 6월 출장을 혼자 보내는 대신 8월 출장에 동행해서 케니스의 근사한 송별회도 겸하기로 했다.




 이제 올해도 슬슬 하반기로 접어들어 내년 목표와 예산을 수립할 타이밍이 되었다. R&D 연간 예산 회의가 지난 금요일에 예정되어, 홍콩에 간 아밀리와 네덜란드의 나는 수시로 상의했다. 그런데 모든 준비가 거의 마쳐진 지난 주 초에 갑자기 계획 변경생겼다. 금요일 전체 회의 전에 아밀리에게 급히 이를 알려주어야 했다.


 다음은 아밀리와의 채팅.

 

 홍콩 출장에 이제 태어난 지 9개월 남짓한 아기를 데려갔다는 말이었다. 오 마이갓. 일단 아밀리가 내 눈치를 살피지 않도록 얼른 하트를 날려주었다. 하지만 내심 '내가 아밀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아기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으면 출장이 어렵다고 얘기를 했어야지. 게다가 인수인계 중에 아기는 누가 돌보는 거지?' 많은 질문이 머리에 맴돌았다.


 아밀리는 오후 3시쯤, 홍콩시간 저녁 9시경에 연락해 왔다.

 잠시 후 화상 회의 카메라가 켜지고 아밀리는 호텔 라운지 같은 곳에 앉아있었다.


나: 아기는 재웠어? 아니 일하는 동안에는 어떻게 돌봤어?

아밀리: 유모를 데려왔어.

나: 아!! 한 달 전쯤 급히 유모 면접 본다고 한 게 이 출장 때문이었던 거야?

아밀리: 응

나: 아휴. 잘했네. 급히 어레인지 하느라 애썼겠다. 8월에는 어머니랑 같이 온다고?

아밀리: 응. 다행히 엄마가 함께 와주실 수 있대.

나: 너도 참 대단하다. 강한 여성이야. 그나저나 유모에 엄마까지 함께 다니려면 비용이 장난이 아닐 텐데 대체 어떻게 감당하는 거야?

아밀리: 사실 그렇지 않아도.. 연구소장 레벨에서 결재가 날 사항이 아니어서 CEO랑 인사부 헤드까지 올라갔지만 별문제 없이 모두 승인이 났어.

나: 와우!!


 순간 아밀리가 있는 곳이 호텔 라운지가 아니라 거실과 방이 따로 있는 스위트룸인 게 보였다. 남남인 성인 여성 두 명이 아기를 함께 돌보아야 하니 스위트룸이 필요했으리라.

 우리는 빠르게 업무 주제로 넘어가서 상황을 잘 전달하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화상 회의를 마치고 컴퓨터를 끄고 나자 다시 아밀리의 상황에 압도되었다. 와우!! 이런 게 가능한 거야? 그리고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네덜란드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16주의 출산 휴가를 쓸 수 있다. 아버지도 6주를 얻는다. 그리고 추가로 26주의 육아 휴직이 엄마와 아빠에게 각각 주어진다. 이 육아 휴직은 아이가 8살이 될 때까지 나누어 쓸 수 있다. 우리 회사 직원들의 대부분은 6개월을 쉬고, 남은 휴직을 3~4년 동안 1주에 하루씩 사용한다. 엄마 하루, 아빠 하루 집에서 아이를 돌볼 수 있으니, 일주일에 3일만 보모를 쓰거나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낸다.


 아기가 성인(만 18세)이 될 때까지 네덜란드의 공립학교 교육비와 의료비는 전액 무료이다. 나같이 거주권을 받아서 생활하는 외국인의 자녀도 모두 포함이다. 대학교 수업료도 저렴한 편인데 (EU학생 기준 연간 300만 원 수준) 거의 모두에게 매우 낮은 이자율의 학자금과 생활비 대출이 제공되고, 최대 35년간 자유로운 분할 상환이 가능하다. (자료 출처: https://www.studyinnl.org/finances/tuition-fees, DUO - Student finance (duo.nl) (Business.gov.nl).

 일정 소득 수준이 넘어가면 소득의 반 이상을 세금으로 내야 하지만, 그 세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훤히 보이는 복지 국가다.

 현재 네덜란드의 출산율은 2023 기준 여성 1인당 1.68명이다.

 



 아밀리의 상황을 보며, 네덜란드의 복지 시스템과 기업 문화가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출산 휴가, 교육비와 의료비 무료, 그리고 낮은 대학 수업료 등은 네덜란드의 높은 출산율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지금 한국 사회가 출산율 문제로 심각하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나에게 이 복지국가, 복지 기업의 문화는 새삼 놀라웠다.

 아기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내가 어릴 적 살던 복도식 아파트에서는 온 집이 문을 열어 놓고 살았다. 엄마가 집을 비워도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간식 얻어먹고 피아노 치고 그랬었다.

 모두 문을 닫고 사는 현대 사회에서는 회사가 마을이고 커뮤니티가 아닐까. 회사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 볼 만한 신선하고 조금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대문 사진: 오늘 오후 내 방 창문에서 찍은 하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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