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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 《사월에 부는 바람》

모든 바람이 희미해지고 왜곡되는 지금 우리는...

by 우주에부는바람

제주에 내려 오고 이십여 일이 훌쩍 지났다. 내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에서 태어난 대학 선배와 부군인 형님을 만났다. 결혼하여 서울에서 살던 두 사람이 제주에 내려온 지 이십여 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옛날식 함박 스테이크를 잘 하는 집에 들러 점심을 먹고 두 사람의 집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집 마당의 새끼 고양이들은 낯선 이들을 피하여 후다닥 달아났고 잠시 후 다시 나타났다.


『4·3은 모든 사람이 죽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참혹한 사건이다. 4·3은 살과 피를 잃은 채 땅속 뼈로만 존재한다. 나의 글쓰기는 그 뼈를 발굴해내어 그 뼈에 피와 살을 붙여넣어야 했다. 그러한 문학에는 당연히 유혈이 낭자할 수밖에 없다. 인도의 맨부커상 수상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문학이 허용하는 피의 양은 얼마인가?”』 (p.14)


집을 나서기 전에 형님이 내어준 책이 두 권인데 그중 한 권이 현기영 선생의 『사월에 부는 바람』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책에는 4·3의 내용들이 계속하여 등장한다. 4·3의 공식적인 시기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이고, 현기영 선생이 1941년생이니 작가의 생의 초기 일부분이 진하게 겹친다. 책에서 지적한 바 현기영 선생이 산 아래로 이사를 하지 않았다면 자신 또한 희생되었을 수 있었다.


“4·3의 현장은 이제 쪽빛 바다를 배경으로 음영 짙은 검은 돌담, 진초록의 보리밭, 샛노란 유채밭이 아기자기한 모자이크를 이루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변해 있다. 4·3의 한 많은 세월을 아스팔트로 깔아뭉개고 관광도로가 이 섬의 산야를 종횡무진으로 질주한다.” (p.44)


제주 4·3을 제일 처음 접한 것은 김석범의 《화산도》를 통해서였다. 1988년 대학에 입학하고 그 해 여름 드디어 방학다운 방학을 맞았고, 여러 대하소설을 섭렵할 수 있었다. 이주영의 《객주》, 이병주의 《지리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도 당시에 읽었다. 그때는 만화방에서 만화 뿐만 아니라 여러 소설들을 빌려 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화방에 구비되어 있던 저 소설 리스트가 놀랍다.


“4·3의 슬픔은 순수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감미롭기까지 한 애잔한 슬픔, 즉 멜랑콜리 따위의 슬픔이 아니라, 피와 비명과 떼죽음 같은 무서운 고통의 슬픔이다. 무서운 공포 속의 슬픔은 눈물도 허락하지 않았다. 두려움 때문에 죽은 자를 위한 곡성을 내기는커녕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덜 슬퍼야 눈물이 나온다고, 살아남은 자들은 말했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감각으로 고향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러한 시각은 내 자신을 객관화하는 일과 별로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p.96)


당시에는 아직 5·18의 실상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을 때였으니 《화산도》를 읽으면서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역사적 사실임에 혼란이 컸다. 그러나 매해 사월이면 제주를 오월이면 광주를 그리고 유월이면 87년 민주화투쟁을 기념하며 그 사건들을 역사에 각인시켰다. 그러나 이제 뉴라이트 역사학자를 비롯한 극우 세력들에 의해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끊임없이 변색되고 왜곡될 위험에 처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도대체 뭐가 뭣인지 모든 게 뒤죽박죽이어서 대중은 그야말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저질 상품문화에 물심양면으로 젖어들어 뭐가 뭔지 판단이 안 서는 것이다. “오, 자유”라는 말 한마디에 피가 끓어오르던 때가 엊그제인데, 이제는 그 ‘자유’가 넌덜머리 난다. 엊그제는 적과 동지가 이분법으로 명백히 구분되었는데, 변화된 오늘은 모든 게 뒤엉켜 혼란스럽다. 객관적 진리도, 주류사상도, 지도사상도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p.217)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입에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지극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누구나 이 사건들을 거론할 수 있게 된 지금, 그 역사가 더욱 선명해졌느냐 하면 그렇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이 팔십 중반의 나이든 소설가가 느끼는 위의 문단과 같은 혼란을 나또한 피하지 못하고 있다. 옮고 그름 또한 그저 파워 게임의 결과로 치부될 뿐인 지금, 우리는 어떤 바람 안에 있는 것인지...


현기영 / 사월에 부는 바람 / 한길사 / 229쪽 /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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