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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읽지 않았음에도 읽은 것으로 여기던 책을 이제야...

by 우주에부는바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이 극장 상영중이다. 넷플릭스 제작 영화로 이례적인 극장 개봉이다. (곧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다.) 〈판의 미로〉 이후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을 크게 좋아히기 시작한 아내와 함께 극장을 찾기로 하였다. 그리고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정말로) 읽기 시작했다. 《프랑켄슈타인》이야말로 너무 유명하여, 읽지 않았음에도 읽은 것으로 여기는 작품들의 대표 주자다.


“어떤 광인의 꿈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저 하늘에서 태양이 빛나는 것만큼 확실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어떤 기적이 개입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뚜렷하고 개연성 높은 단계들을 거쳐 발견한 것이었지요. 밤낮없이 극심한 노고와 피로로 몸을 혹사한 끝에 마침내 발생과 생명의 근원을 밝혀냈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나는 생명이 없는 물질을 움직이게 하는 능력을 갖게 됐습니다.” (p.64)


또한 제목인 프랑켄슈타인(프랑켄의 돌이라는 독일어 의미를 가지고 있고, 13세기에 성씨였지만 현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이라는 성씨는 괴물을 창조한 인간에게서 비롯되었지만 종종 괴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이름이 없는 《프랑켄슈타인》 속의 생명체는 창조물, 피조물, 괴물 등으로 지칭된다. 그리고 지성을 갖춘 다음에는 ‘나’라는 인칭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고 변호한다.


“... 그때까지 어떻게든 잊으려 했던 일을 머릿속으로 되짚어보았습니다. 창조물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과 내 손으로 만든 존재가 살아서 내 잠자리에 나타났던 일, 그리고 사라진 일까지. 그가 생명을 갖게 된 지 2년이 다 되어가는데 과연 이 살인이 처음이었을까? 아! 나는 살육과 참극을 즐기는 타락한 괴물을 세상에 풀어놓은 겁니다. 내 동생도 죽이지 않았습니까?” (pp.100~101)


소설에서 ‘나’는 프랑켄슈타인이기도 하고 때로는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낸 피조물이기도 하다. 프랑켄슈타인은 심혈을 기울여 생명이 사라진 것에 다시 생명을 불어 넣었다. 하지만 그렇게 탄생한 것을 보자마자 혐오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떠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에 의해 자신의 친구인 앙리 클레르발, 동생인 윌리암, 아내가 된 엘리자베트를 차례대로 잃었다.


“... 나는 당신의 피조물이니 당신이 본분을 지킨다면 나의 주인이자 왕인 당신에게 복종하겠다. 아, 프랑켄슈타인. 다른 사람들에게는 도리를 다하면서 나만 짓밟으려 하다니. 누구보다도 나를 공정하게 대해주고 관용과 사랑을 베풀어야 할 사람인데. 내가 당신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지 마. 나는 당신의 아담이 돼야 하지만 타락 천사가 됐지. 당신은 죄없는 나에게서 기쁨을 빼앗아 갔어. 온 세상이 축복으로 가득한데 오직 나만 지독한 외톨이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인정많고 선량했지만 비참한 삶이 나를 악마로 바꿔놓았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면 다시 선량하게 살겠다.” (pp.136~137)


거기에서 그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친구인 앙리의 죽음에 나를 끌어들이려다 실패하였고, 동생 윌리암의 죽음 이후에는 착한 하녀 쥐스틴에게 누명을 씌웠다. 쥐스틴은 결국 사형을 당했고 이 또한 그것이 만들어낸 죽음이다. 나와 결혼한 엘리자베트가 첫날 죽음을 맞고 그 사건에 충격을 받아 나의 아버지가 죽었으니 이 또한 그것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그것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나 프랑켄슈타인이다.


“넌 노예야. 좋은 말로 설득하려 했는데 그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었군. 내가 어떤 힘을 지녔는지 잊지 마라. 넌 이미 네가 불행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네가 햇살조차도 진저리 낼 만큼 더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 넌 나의 창조주이지만 난 너의 주인이야. 그러니 복종해!” (pp.236~237)


소설은 프랑켄슈타인의 시점과 동시에 그것의 시점 또한 등장한다. 읽다 보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명을 부여받았지만 탄생하자마자 자신의 창조주로부터 버림받은 그것을 그저 괴물로 치부하기 힘들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악마였다기 보다는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되면서 악마화되었다. 그것은 어떻게든 자신 내부의 선함을 끌어내보려 하였고, 그러한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것은 프랑켄슈타인을 비롯한 인간들이었다.


“이 자도 내 희생자다! 그를 죽이는 것으로 내 죄는 완성됐군. 굴곡진 내 비참한 삶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아, 프랑켄슈타인! 고결하고 헌신적인 존재여! 그대에게 나를 용서하라고 애원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파괴함으로써 당신을 돌이킬 수 없이 무너뜨렸지. 아! 이제는 차갑게 식어 나에게 대꾸할 수도 없구나.” (p.311)


200여 년 전의 소설이고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오해되)는 작품이지만 읽다 보면 꽤나 흥미롭다. 산업 혁명의 시기,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인간(프랑켄슈타인)의 욕망이 만들어낸 괴물이면서 인간을 뛰어넘는 힘을 지닌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인공 지능에 지배당하는 인간이 상상되는 요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 면에서 소설의 액자 역할을 하는, 탐험가 월튼이 무모한 여정을 중단하고 돌아선다는 설정 또한 의미가 있다.


메리 셸리 Mary Shelley / 박아람 역 / 프랑켄슈타인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 휴머니스트 / 341쪽 / 2022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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