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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식 《너에게 미치도록 걷다》

길에서 만나는 부처 혹은 그들...

by 우주에부는바람

긴 길을 떠나고 싶은 염원이 있었다. 아직 이십 대일 때 나의 감각은 온통 인도를 향해 있었다. 커다란 곡절이 없었음에도 출발하지 못했다. 어쩌면 출발하지 않았다, 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나는 출근을 시작했고 결혼도 했다. 한참 시간이 흘러 인도를 다녀온 고등학교 동창이 수백 장의 사진을 갖고, 어느 새벽 내 신혼집에 찾아왔다. 먼동이 트기 전에 제 집으로 돌아갔다.


“지평선에 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가족의 실루엣이 걸렸다. 아버지는 알 굵은 감자나 무 따위가 들었을 보따리 두 개를 이고 맨 앞에 섰다. 그 뒤로 두어 살쯤 되었을 막내딸 아이가 맨몸으로 따라 걷는다. 땔감과 염소 꼴을 머리 멜빵으로 잔뜩 인 어머니가 그 뒤를 따르고 빨간 보따리를 인 큰 딸은 보자기 빛깔만큼이나 붉은 노을을 끌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하루가 길에서 또 저문다.

지평선 가족을 마중 나온 강아지가 깡충깡충 뛰면서 지평선을 낮췄다가는 들어올리기를 거듭하다 힘에 부치는지 제자리에 놓아두고는 냉큼 집 쪽으로 내달려간다.” (pp.39~41)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 후지와라 신야의 책들을 읽었다. 《인도 방랑》, 《티베트 방랑》, 《동양기행》을 읽는 동안 다시 한 번 마음이 들썩거렸지만 그저 세월만 들썩거리면서 흘러갔다. 신산하다고 표현하기엔 무난하였지만 무난하다고 하기엔 지극히 사적인 시간들이 떠들썩하였다. 그동안 삼십 세가 사십 세가 오십 세가 다가오는 것을 그리고 지나쳐 가는 것을 애써 바라보았다.


“사물과 사물은 제자리를 떠나 서로 겹쳐진다. 내가 걸으면 안개는 들판이라는 인화지에 나무와 집들과 사람들을 평면으로 몽타주시킨다.

그래서 안개 속을 걷는 일로는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모든 게 도무지 두께가 없이 얇아져버리는 까닭이다. 걸음 앞에 안개는 그 평면화시킨 사물들의 껍질을 한 켜 한 켜 벗겨내서 새로 찍은 사진을 보여줄 뿐이다. 걸음만이 그 사진첩을 넘길 수 있다. 넘겨진 사진은 추억을 끌고 다시 안개 속에 묻혀버린다.” (p.55)


《너에게 미치도록 걷다》에는 ‘방랑작가 박인식의 부처의 길 순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실은 2010년의 여행기이고 당시 이미 발간되었던 것의 개정판을 이번에 접하였다. 책의 초반에 등장하는 몇몇 표현들은 너무 좋아서 왔다 갔다 하며 몇 차례씩 연거푸 읽었다. 작가에 대해 문외한이었는데 다방면으로 여러 권의 책을 써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가의 시집이 궁금하다.


“날란다 가는 길에 밀밭과 숲이 다시 바다로 넘실댔다. 지평선으로도 마감되지 않은 그 평원은 거대한 책자를 펼쳐놓은 것 같았다. 그 책자에 농부들은 밀이며 감자며 옥수수 따위의 글씨를 써놓았다. 하루하루 걷는 사이, 들판은 책장을 한 장씩 넘겼다. 어제 읽은 밀밭은 오늘 읽은 유채밭에게 책장을 넘겼다.” (pp.191~192)


《너에게 미치도록 걷다》는 부제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부처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길을 따라 네팔과 인도를 넘나드는 여행기이다. 그 길은 부처가 태어난 룸바니에서 시작되고, 깨달음을 얻는 보드가야와 깨달음을 설파하기 시작한 사르나트를 거쳐, 열반에 든 쿠사나가르로 이어진다. 네팔에서 시작되어 인도로 들어와 네팔에 가까운 인도에서 끝나는 길은 총 1200 킬로미터에 이른다.


“걱정하지 말라. 그대들이 늘 기억하고 찾아봐야 할 이곳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난 룸비니와 깨우침을 얻은 보드가야와 법의 바퀴를 굴리기 시작한 사르나트와 열반에 드는 이곳 쿠시나가르다. 이 네 곳을 순례하며 내 가르침을 떠올릴 수 있다면 나를 다시 만나 내 가르침을 따르는 것에 다름없다. 나는 늘 거기 있을 것이다. 거기서 그대들을 기다리리라. 그리고 아난다야. 나를 찾으러 올 때는 너 자신을 등불 삼고 네 자신에 의지하여야 한다. 네 자신 밖의 것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네 자신에 전념하도록 해라.” (p.353)


이미 서른 즈음에 히말라야 산길을 스무 차례나 헤맨 전력이 있고, 마흔 즈음에는 두어 차례 실크로드를 다녀온 적이 있는 작가가 육십 세에 즈음하여 택한 것이 바로 ‘부처의 길’이다. 그리고 이 여행기의 페이지마다 만나는 것은 네팔과 인도의 농촌에 붙박여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작가가 만나려 했던 것은 (어쩌면) 부처이고 작가가 만난 것은 (실제로는) 그들인데, 책을 읽고 나면 이 둘이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박인식 / 너에게 미치도록 걷다: 방랑작가 박인식의 부처의 길 순례 / 생각정거장 / 373쪽 / 202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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