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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로페즈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장소에 대한 성찰로 점철된 인문학적 탐험을 끝내며...

by 우주에부는바람

“우리에게는 우리를 삶의 예의로 다시 데려다줄 타인이 필요하다. 이것이 내가 최종적으로 얻은 교훈이었던 것 같다. 타인의 포용을 용서나 우호적인 판단이 아니라 인정으로 받아들여 환영하는 것. 누구나 때때로 남들이 모르는 각자의 삶에서 잔혹한 역경을 맞기도 하며, 어떤 식으로든 공동체를 이루는 서로가 없다면 이 악몽은 언제든 되살아날 기회를 노리며 도사리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 (p.117)


- 《호라이즌》이 배리 로페즈의 생전 마지막 책이라면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는 그의 사후 이 년여가 흐른 뒤 나온 책이다.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책의 전반부에는 특히나 그가 겪은 어린 시절의 폭력 그리고 이를 벗어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내용들이 담겨 있다. 위의 문단은 그 시간과 시기들의 뒤에 그가 깨달은 교훈이다.


“한때는 다양성이 생명의 특징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다양성은 생명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다양성을 말소하는 것은 탄소를 제거해놓고 생명이 지속되기를 기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멸종 위기에 놓인 언어, 생물 종, 문화를 얼핏 지나치기만 해도 그토록 불안해지고 그토록 슬픔이 차오르는 건 그런 까닭일 것이다. 우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이 어디든 거기서 마주치는 차이가 적어질수록 죽음이 세력을 확장한 것임을 우리 몸의 세포들이 알아차리는 것이다.” (p.124)


- 그의 글 대부분에는 인간 문명의 무분별한 확장을 반대한다는 암시가 강하게 깔려 있다. 자연을 이루는 다른 부분들에서 발견되는 멸종이 곧 인간이라는 종의 멸종과 밀접하다는 사실을, 그는 세계의 여러 장소들이 그리고 그곳의 생명체들이 스러져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유추한다. 무시하기 힘들고 거부할 수도 없는 결론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지금도 시시각각 많은 것들이 사라져가고 있을 터이다.


“이따금 나는 여행가로서 어느 곳의 풍광을 가장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의 타나미사막인가요? 발리의 계단식 경작지인가요, 아니면 칠레 남부의 내륙수로인가요? 인터뷰 진행자가 묻는다. 내 대답은 언제나 같다. 아닙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광은 오리건 서부의 내 집입니다. 1970년 여름부터 줄곧 살아온 곳이지요.

내 집은 메켄지강 북쪽 기슭의 오래된 잡목 자연림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경작을 하기에는 경사가 가파른 골짜기라 거주 인구가 많지 않다. 벌목 산업이 산비탈을 깎아내고 곳곳에 피해를 입혔다. 그렇지만 여전히 치누크 연어가 내 집 앞에서 산란을 하고, 무심코 창밖으로 눈을 돌리면 보브캣과 밍크와 흑곰이 지나간다. 근처 숲에는 엘크와 퓨마가 살고, 코요테와 비버, 수달, 검은꼬리사슴도 산다. 나는 이들의 발자국을 자주 마주친다. 강에서는 물수리와 뿔호반새의 울음이, 나무에서는 큰까마귀와 도가머리딱따구리와 다른 많은―휘파람새, 풍금조, 개똥지빠귀를 비롯한―새들의 울음이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p.135)


-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다. 남극과 북극을 비롯해 팔십여 개의 나라를 여행한 그이지만 가장 좋아하는 풍광은 자신의 집이 속해 있는 ’메켄지강 북쪽 기슭의 오래된 잡목 자연림‘에서 찾았다. 1945년생인 그는 서른이 되기 전인 1970년부터 이곳에서 살기 시작했으니 성인이 된 후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 셈이다. 그저 심리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서 바라다보이는 것들의 충만 때문일 것이다.


“근대 문명의 특징인 실존적 고독과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는 것은 얼마쯤은 장소와의 관계에 치유적 차원이 있다는 믿음을 내버린 탓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연 세계에는 인식 가능하며 그렇기에 관찰자를 포옹하는 패턴들이 항상 존재한다. 끝없이 복잡한 이 패턴들은 부단히 새롭게 느끼는 감각은 세상에 혼자라거나 삶이 덧없다는 느낌을 약화시킨다. 결국 장소를 깊이 알고자 하는 노력은 어딘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 인간의 소속 욕구를 표현하는 일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 어떤 장소를 알아가려는 굳은 의지는 끊임없이 보상을 받는다. 나는 자연의 모든 장소가 ‘알려짐’에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과정의 어디쯤에선가 인간은 자신들이 ‘알려지고’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하고, 그렇기에 그들이 아는 장소에서 그들의 존재가 사라질 때 장소는 그들을 그리워한다. 서로가 알고 알려지는 이런 교감이야말로 내가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는 의식을 강화한다.” (p.197)


- 작가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파악한 모습들을 보자면 그의 것은 여행이라기 보다는 탐험에 가깝다. 그는 단순히 어떤 곳이 아니라 정확한 장소에 접근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 그리고 모든 감각을 동원한다. 여기에 ‘어떤 장소를 알아가려는 굳은 의지’가 결합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장소를 알 수 있고, 이렇게 아는 장소가 되면 장소와 인간의 교감이 생긴다. 어쩌면 그 교감의 일단이 작가의 책들에 담겨 있다.


“... 손에서 연줄이 흔들릴 때, 뭔가 다른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연이 곤두박질치다가 솟구칠 때, 공기의 흐름을 아슬아슬하게 타다가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머리를 틀 때, 나는 바람의 몸부림을, 그 우아한 도약을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은 이곳에 사는 유일한 동물이다... 우리의 작고 단출한 캠프에서 보면 남극기지는 새하얀 대양에 떠 있는 모선母船 같기도 하고 우주정거장 같기도 했다. 이 추위와 고요, 비생물적인 정적, 침범할 수 없을 만큼 공허한 하늘, 더없이 무심하고 완강한 설원, 야생 건포도마냥 점점이 흩뿌려져 있는 운석 조각들, 이보다 더 우주의 문턱에 가까이 놓인 환경을 나는 알지 못한다.” (p.301)


- ‘바람은 이곳에 사는 유일한 동물이다’라는 표현이 좋다. 그가 느꼈을 적막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표현이다. 직접 몸을 움직여 세계의 여러 장소에 한동안 머무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메모를 했고 책으로 펴냈다. 장소에 대한 그의 깊은 성찰은 인간 문명을 향한 우려로 연결되어 우리를 각성시킨다. 물론 그 장소를 보다 명확히 하고자 하는 표현이 보여주는 아름다움 또한 쉽사리 잊기 힘들다.



배리 로페즈 Barry Lopez / 이승민 역 /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Embrace Fearlessly The Burinig World) / 북하우스 / 387쪽 / 20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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