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하다고 여겼던 것들은 여전히 기이하고...
“울적한 시간에 슬픔을 보태 권태로운 시간으로 만들면 안 된다. 그리고 아마도―혹시 미신을 믿는다면―기다림을 보태 요지부동의 시간으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 하프시코드로, 피아노로, 바이올린으로, 비올라로, 샤미센으로, 첼로로 무슨 곡이라도 연주해야 한다. 정원으로 나가 살랑거리는 관목들이나 해 질 녘 오므라드는 꽃잎들에 물을 주고, 더위가 한창일 때 뒤집어쓴 먼지를 없애주어야 한다. 책을 한 권 번역하거나, 바탕천에 자신이 고른 도안을 연필로 그려놓고 욕망의 꿈을 수놓아야 한다. 악보를 집어들고, 그것을 하얗게 지우고, 침묵으로 채우고, 아름답게 꾸미고, 운지運指로 연주해야 한다. 허기진 우리에게―낮에 꿈꾸던 음식이 밤에 꿈속에서 제공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마실 것을 주던 아주 길고 부드러운 젖가슴에서 우리가 영양을 취하던 시기 이후로,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느끼게 된 불행한 감정을 떨쳐낼 온갖 구실을 찾아내는 게 바람직하다. 비록 울적할지라도 후회 없는 시간은 환영이다.” (pp.95~95)
한 해가 마무리되는 시기에 접어들면 얄팍하게 죽음을 추체험한다. 지나온 시간들 중의 일부가 급작스레 다가온다. 구석구석에 깃들어 잇던 생의 표현들을 억지로 찾아내고자 한다. 후미진 곳,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찾아낼 수 없는 것, 어쩔 수 없던 선택의 시간이나 다시 발길 들이고 싶지 않은 장소가 차곡차곡 찾아든다. 서서히 돌아가는 주마등으도 더욱 당혹스러운 시간들이다.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을 소환하려면 그것을 집어넣을 함을, 은닉할 궤를, 보이지 않게 숨길 방주方舟를 꾸며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소설이라 부른다.” (p.117)
가지고 있지 않은 상자에 무언가를 채울 수는 없다. 채울 수 없음에도 퍼부어왔다. 흘러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부어야만 하는 사람은 비워지는 것이 두렵다. 숨을 곳이 없는 백주의 숨바꼭질에서 술래는 승자인가, 패자인가. 그때 도망치는 아이들은 무조건 패자이기만 한 것인가. 골목과 계단이 가위의 양날처럼 교차하는 곳을 뛰어가는 아이들과 눈이 부셔 손차양을 치는 순간의 술래가 부딪치는 순간...
“... 우리도 죽음이 가까워지면 거실 구석에, 눈이 부시지 않게 비스듬히 기울인 작은 전등 옆의 그늘에 숨는다. 나이 들수록 추해지거나 적어도 늘어지고 주름진 피부가 부끄러워 숨는다. 시간이 더 모자라게 될 다음 날을 피하려고 숨는다. 가짓수가 늘어나는가 하면, 새롭게 드러나거나 낌새가 느껴지는, 아무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병에 대한 걱정 속에 숨는다. 우리는 커튼 귀퉁이에서, 창문 근처에서, 책을 벗삼아, 즉 세상의 기억 속에 숨는다. 세상에 대해 남겨진 가장 생생한 기억 속에 숨는다. 세상에 대해 남겨진 가장 생생한 기억 속에서 자신의 두려움을 잊는다. 가장 정감 어리고 파괴적인 유년기 경험의 가장 감동적 순간들로 피신한다. 그 순간들이 내면 깊은 곳에서 움직이고 되살아나는 것을 즐긴다... 행복한 시간들, 그대들은 사회적, 역사적, 심지어 가족적 연대기의 그물망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전기적 연대기에서조차도. 사생활의 어둠에 은닉되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순간들. 너무 개인적이라 알려지고 싶지 않은 순간들. 감각의 침묵과 형언할 수 없는 친숙한 냄새라는 보물이 깃든 장면들...” (pp.124~125)
‘행복한 시간들’은 정말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느낄 수 없는 순간에 비로소 존재하는 무엇인가? 추구하고 다가서는 순간 그만큼 멀어지는 것인가? 이미 충분히 지나쳐 왔는데 그만 못 보고 넘어간 표지판 같은 것인가? 너무 빠른 생에 탑승하여 지나쳐 버린 것인가? 바라볼 수는 있지만 거리를 가늠하기는 힘든 곳에 있는가? 과연 그런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사랑은 생生의 약동에 직접 맞닿아 있는 무無동기의 유일한 동기이다.
사랑은 행운이다.
“누가 자신의 생각만큼 불행한가? 누가 자신의 기대만큼 행복한가?”
우리에게 닥친 치명적 질병의 선고는 갑자기 낙원의 그림자를 경계 짓는다.』 (p.216)
그림자는 없는 것으로 치부되면 안 된다. 경계는 그것을 넘어서고 나서야 확인되는 무엇이다. 자연은 인간처럼 경계를 정하고 있지 않다. 경계는 인간의 특징이고 자연에게는 부당하기만 하다. 모양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모습은 모호하다. 모호해지는 경계는 자연의 역습이고 속수무책이다. 파괴하고 파손되면서 뒤섞인 모든 것들이 우리 안에 모순으로 가득하다. 헤어나기 힘든 폐허 속이다.
“1979년에 쓴 글이 1640년에 읽히기를 바라는 것은, 시간temps에 방향이 없으므로 시간의 방향을 전도시키는 게 아니라, 시간의 방향 설정 관습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것은 역사에서 가정된, 혹은 잔혹한, 혹은 하찮은, 혹은 미신적 연속성을 근절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삶을 시간이 남긴 잊을 수 없는 폐허에 내주는 일이다.
인용은 파손하기다.
인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모두 파손된다. 그러나 지시대상은 봉인이 풀리고, 안장이 떼어지고, 속박이 해제된다.
자신의 해방을 노리는 모든 것, 관계를 끊고, 족쇄를 제거하며, 나무 차꼬를 산산조각 내려는 모든 것, 자유를 쟁취하려는 모든 것은 파손된다.” (p.246)
결정의 순간은 언제든 다가온다. 시간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지만 우리는 때로 생의 멈춰진 순간에 사로잡혀 움직이지 못한다. 자유를 숭배하였지만 그것이 족쇄가 되기도 한다. 치렁치렁한 쇠사슬 소리가 난무한다. 생의 모든 순간이 음악이라면 침묵의 휴지기도 음악이 된다. 기이하다고 여겼던 것들은 여전히 기이하다. 시간만이 해결해줄 수 있는 것들은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태어나고, 살고, 번식하고, 죽는 것은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운heur―행복bonheur과 불행malheur의 혼합―을 형성하는 것으로, 매 순간 당황스러운 만큼 일생 동안 감당하기에는 매우 기이한 일이다.” (p.311)
파스칼 키냐르 Pascal Quignard / 송의경 역 / 행복한 시간들: 마지막 왕국 Ⅻ (Les Heures Heureuses: Dernier royaume Ⅻ) / 문학과지성사 / 340쪽 / 2025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