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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와다 요코 《목욕탕》

언어가 많아 말로부터 부유한다는 아이러니...

by 우주에부는바람

“인간의 몸은 팔십 퍼센트가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거울 속에 매일 아침 다른 얼굴이 비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마와 뺨의 피부는 매 순간 그 아래에서 흐르는 물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는 늪의 천장과 그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인간의 움직임처럼 변한다.

거울 옆에 있는 액자에는 내 얼굴 사진이 걸려 있다. 나는 거울 속 모습과 사진 속 모습을 비교하는 것으로 매일 일과를 시작하고 이 차이를 화장으로 고친다.” (p.7)


말은 어디에서 나오지? 언어는 어디로부터 비롯되나? 말이 소리와 분리되는 지점은 어디일까? 소리가 혀에 닿아 말이 된다는 말은 말이 되는 것일까? 소리가 혀의 외피를 따라 파괴되지 않고 입 바깥으로 나올 때 드디어 말이라는 외양일 띠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말은 혀로부터 시작되고 언어는 몸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소설 속의 나는 소리와 말과 언어의 어디쯤에서 유랑 중인 것일까?


“어떤 마을에 대식가 여자가 살았다. 이 여자는 일을 열심히 잘했고 마음이 착해서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매일매일 이 여자는 남자들도 놀랄 만큼 많은 공기의 밥을 먹었다. 그러나 여자는 이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려 하지 않았다. 여자는 늦은 밤 혼자 가축우리에서 밥을 먹었다. 어느 날 저녁 어떤 남자가 몰래 이 가축우리에 와서 엿봤는데, 여자의 머리카락은 모두 뱀이었고 이것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이 남자는 거의 실성한 상태에서 총을 가져와서 여자를 쏴 죽였다.

사람들은 머리카락이란 피부가 죽어 경화된 부분이라고 이야기한다. 내 몸 중 일부는 그러니까 이미 죽은 것이다.” (p.15)


《목욕탕》은 소설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서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통상적인 방식을 따르지는 않는다. 동시 통역의 일을 하고 있는 나는 어느 날 일본 회사에 고용되어 독일의 파트너와 만나는 자리에 나선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나는 제대로 된 소통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외려 정신을 잃고 어떤 호텔 직원의 방에서 겨우 깨어난다. 소통은 실패하였고 꿈 속에서 혀를 잃었으며, 이제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사람들의 입은 열린 쓰레기 봉지처럼 쓰레기들을 쏟아냈다. 나는 그 쓰레기들을 씹고 삼키고 다른 나라 말로 다시 토해내야 했다. 이 말들의 일부는 니코틴 냄새가 났고 다른 것들은 머리 기름 냄새가 났다. 대화는 활기찼다. 모두 내 입을 거쳐 말을 했다. 모든 소리는 내 위에서 압축되었다가 다시 나왔다. 소리의 발자국은 내 뇌 속까지 울렸다. 위 속에 있던 생선 조각들이 메스꺼워졌고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내 위가 수축했고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말을 더듬을 때 나는 기분이 아주 좋아진다...” (p.33)


서사가 끊긴 지점에서 소설은 계속된다. 소설에는 내가 마주하였던 많은 인물들이 계속적으로 등장한다. 나는 그들을 통하여 말을 배웠고 그들과 소통하기 위하여 말을 하였으나 그 말들을 마냥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말과 관련이 되어 있는 모든 과정들에 몰두한다. 말은 나와 분리될 수 없는 무엇이고, 그러니 주고 받는 모든 말들로 인해 나는 혼란스럽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말을 더듬을 때’ 기분이 좋아진다.


“... 말을 가르쳐준 사람에게 나는 그 자리에서 사랑에 빠진다. 크산더가 내 앞에서 해주는 말들을 반복하는 동안 내 혀는 그의 소유로 넘어갔다. 크산더가 담배를 빨면 나는 기침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내 혀는 불이 난 것같이 아팠다. 크산더는 사물들에게 이름을 줬다. 마치 창조주처럼...” (p.53)


소설은 그리 길지 않고 사용되는 단어 또한 어렵지 않다. 발화의 내용들은 단순하고 크게 요동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당황스러운 것은 끊임없는 변화의 모습들 때문인데, 그 변화는단순한 변화가 아니다. 또한 그 변화는 멈추지 않기 때문에 어렵다. 항상 변하고 있어서 변화 자체를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다. 말은 언어는 사람은 심지어 지구도 그러한 변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구는 칠십 퍼센트가 물로 뒤덮여 있다고들 한다. 그래서 지구 표면이 매일 다른 모양을 보여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하수는 아래에서 지구를 움직이고 바다의 파도들은 해변을 갉아먹고 위에서는 사람들이 암석을 파괴하고 계곡에다가 논을 만들고 바다를 둘러싼다.

그렇게 지구의 모양이 변해간다.

나는 세계지도를 펼친다. 지도 위에는 물의 움직임이 멈춰 있어서 도시들은 항상 같은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시에서 도시로 그어진 수많은 붉은 선들은 항로와 어망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 그물에 갇힌 지구의 얼굴들을 매일 지도의 모델에 따라 화장시킨다.” (p.92)


젊은 시절 일본에서 독일로 건너간 후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본 작가인 다와다 요코는 이중의 언어를 사용해 작품을 발표한다. 《목욕탕》은 작가의 초기작이며, 독일어와 일본어를 모두 사용하는 작가가 오히려 말 자체로부터 소외된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두 가지의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어느 하나의 언어에 정착하지 못하는 부유浮游의 아이러니가 이 힘든 소설이 된 것은 아닐까.


“사춘기의 소녀들만 거울이 없으면 화장을 하지 못한다. 성숙한 여자들은 거울이 필요하지 않다. 피부가 있는 곳은 만져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손을 뻗어 어디에서 이 세계가 끝나는지를 느낀다. 거기가 내 피부다. 피부는 이 세계를 저 세계와 떼어놓는 막이다. 나는 피부가 투명해질 때까지 특별한 화장을 한다. 물론 얼굴만 문지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얼굴만 보이지 않으면 몸은 목이 잘린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어떤 곳도 무시하지 않는다.” (p.99)



다와다 요코 / 최윤영 역 / 목욕탕 / 책읽는수요일 / 115쪽 / 2023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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