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서평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소환된 이 땅의 다양한 저술가들...
장정일의 인터뷰이 43명 중, 그것도 앞부분에서 고성국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편견이나 선입견을 갖지 말라는 아내의 지청구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쉽지 않다. 그래도 금과옥조와 같은 아내의 말이니, 염두에 두어 다른 책들 아래로 기어들어갔던 책을 끄집어냈다. 책은 ‘시대를 만나다’, ‘교양을 만나다’, ‘인문학을 만나다’라는 세 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고, 모두 43명의 인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정일 자신과의 대화가 실려 있다.
‘시대를 만나다’ - 문화연구자 이원석, 일문학자 박유하, 음식칼럼니스트 박찬일, 사진작가 노순택, 정치평론가 고성국, 희곡작가 오세혁, 영문학자 한지희, 극작가 박근형
‘교양을 만나다’ - 만화가 최규석, 나무칼럼니스트 고규홍, 영화저널리스트 김혜리, 칼럼니스트 김어준, 사진작가 윤광준, 희곡작가 이강백, 소설가 이경자, 큐레이터 정윤아, 연극평론가 안치운, 영화문학연구자 백문임, 극작가 선욱현, 지구물리학자 이상묵, 기업인 모모세 타다시, 칼럼니스트 이충렬, 바이올리니스트 최은규, 미학자 이희원, 방송인 이다 도시
‘인문학을 만나다’ - 역사학자 김범, 한국문학연구자 존 프랭클, 방송기자 박성래, 동양철학자 이혜경, 서양사학자 이용우, 인도사연구가 이옥순, 자유저술가 김용규, 생태경제학자 우석훈, 정치학자 박현모, 러시아문학연구자 석영중, 고전평론가 고미숙, 강호동양학자 조용헌, 국문학자 백민정, 문학자 이혜령, 신화학자 고혜경, 역사에세이스트 김기협, 한국고대사학자 이희진, 역사학자 하영휘
하지만 장정일 자신이 밝히고 있듯 이 만남들의 결과는 온전한 인터뷰의 채록은 아니다. 오히려 장정일은 자신의 서평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아마도 장정일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넓게 읽고 그것을 가장 많이 서평으로 남기는 작가일 것이다) 작가들을 동원하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책에 실린 (인터뷰를 전면에 내세운 책임을 염두에 둔다면) 인터뷰이들과의 대화는 상대적으로 짧고, 장정일의 서평은 길다.
그리고 책에 실린 인터뷰들이 만들어진 시점 그 기한이 조금 지난 것으로 생각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서문의 글을 보자면, 이 인터뷰들은 1990년대 초반과 2000년대 말 사이에 이루어진 것 같다. 인터뷰이들 중 일부는 오히려 지금 더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어, 인터뷰들이 옛날 이야기가 되고 말기도 한다. 그중 내 마음을 잡아 끈 어떤 이들의 생각 혹은 장정일의 생각을 몇 군데 옮겨 보자면 아래와 같다.
『... 그(이원석)는 자신의 두 번째 책이면서 자기계발서에 대한 비판적 서평집인 『인문학으로 자기계발서 읽기』(필로소픽, 2013)에서, 일반 대중이 자기계발을 통해 추구하는 이상은 엘리트 계층의 생활이지만, 자기계발의 실현에는 개인적인 성실함 이전에 물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개인의 노력으로 보보스(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의 합성어로 부르주아의 재력과 보헤미안의 취향을 겸비한 ‘신흥 엘리트’를 뜻함)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자기계발 서적과 자기계발 교육 사업은 “새로운 유형의 지배계급이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감추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즉 이들 신흥 엘리트들은 날 때부터 3루에 가 있는데도, 자기 노력으로 거기에 갔다고 대중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p.21, <’자기계발‘에 속지 마라!, 문화연구자 이원석> 중)
“재료와 요리의 희소성과 비싼 가격 때문에 철저하게 부르주아의 취미일 수밖에 없는 미식은 반동적으로 취급됐다. 하지만 미식 취미의 배후에는 맛있는 음식을 공급할 수 있는 농업과 축산업의 발달, 부의 축적, 요리사의 수련과 배출, 미식 행위에 대한 사회적 정의定議가 자리한다. 그런 것이 갖춰지지 않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미식 취미는 ‘먹는 행위’가 아니라, 점점 겉치레 심한 식당에 가서 아무것이나 먹는, ‘보이기 위한 행위(과시)’가 되고 만다.” (p.36, <참 글 잘 쓰는 요리사, 음식칼럼니스트 박찬일> 중)
“최규석 :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지만, 폭력이 담긴 만화에 대해 분노할 힘이 있다면 실질적인 폭력에 대해 분노하는 게 더 사리에 맞지 않는지요? 만화가 아무리 폭력적이어도 그것은 환영일 뿐입니다. 그 패러디를 보고서 당신이 느끼는 폭력이 진짜 폭력인지 곰곰이 묵상해 보세요. 현실은 늘 폭력적이게 둔 채 예술의 세계에서만 부드러움을 찾기보다는, 현실에서의 폭력이 줄어들고 예술에서의 폭력이 증가하는 것이 훨씬 괜찮은 세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 만화를 본 사람들에게서 ‘사는 게 그렇지’를 넘어 ‘다르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라는 반응을 보고 싶었습니다.” (p.77, <만화는 ‘예술’이 되면서 망했어요, 만화가 최규석> 중)
“김어준 : 몇 년간 투고된 사연을 일삼아 읽은 덕에 대한민국 사적 고민 일반에 대한 대략의 공통분모를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성은 삶의 본질인데, 그게 완전히 없어지길 원합니다. 무서운 건 너무 당연한데 말이죠. 그 무서움에 어떤 방식으로 맞서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이 어던 사람이냐를 결정하는데, 많은 이들이 무서움 그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둘째,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 스스로도 모른다는 거... 그 본원적 질문은 건너뛰고 그저 남들은 뭘 선택했는지만 궁금해 합니다. 셋째, 자신이 너무 중요하다, 자신이 겪는 고통만 각별하다고 느끼는 겁니다... 왜 하필 자기여야만 하느냐며 억울해하죠. 그러면 자기 돌보는 데만 여념이 없어 남들 고통을 살필 여력이 없어지죠. 이건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객관화가 안 됐기 때문이라고 봐요.” (p.98, <불확실성은 삶의 본질, 확 벌거벗고 두려움과 맞서자, 칼럼니스트 김어준> 중)
“내면 연기란 말하자면 서양의 인문적 교양을 먼저 선취한 자들의 권력의 산물이다. 그것은 ‘문학적 연극’이랄 수는 있지만, ‘연극적 연극’은 되지 못한다. 내면 연기를 내세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부터 한국 연극은 미학적인 면은 물론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한 연기술에서도 낙후했다. 이 논리의 요점은, 한국의 근대 연극이 연극으로 홀로서기하지 못하고 문학이나 인문학적 교양의 들러리 역할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연극이 상업화되다 못해 오락거리로 전락한 지금, 연극이 대학생 관객들이나 OL(소득수준은 중간 계층이면서 소비수준은 최상류 계층에 맞먹게 행동하는 직장 여성을 지칭한 유행어)들의 ‘필수 교양’이던 때가 오히려 그립기조차 하다.” (p.133, <이 길 끝나는 곳에 한국 연극의 희망이, 연극평론가 안치운> 중)
“박성래 : 오바마는 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전형적인 진보 의제죠. 그런데 대부분의 진보주의자는 변화를 성취하는 과정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도덕성을 앞세워 적을 만드는 거죠. 우리는 멋지고 깨끗한 ‘진보’이고 너희는 더럽고 나쁜 ‘보수’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진보주의자들의 ‘도덕적인 오만’은 쓸데없이 적을 만들어 고립됩니다. 진보의 가치를 실현할 수단들을 스스로 차버리는 거죠. 반면 오바마는 변화와 함께 통합을 강조합니다. 변화를 위해서는 서로 공통점을 찾고 접점을 찾아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그의 변화에는 거의 항상 ‘우리’가 따라붙습니다. 나와 당신이 함께하는 변화를 추구하는 거죠...” (p.215, <적을 만들지 않는 이상주의자, 오바마, 방송기자 박성래> 중)
“사람은 두 가지로 분류된다. ‘낮의 꿈’에 생애를 전부 내건 사람과 ‘밤의 꿈’으로부터 삶의 비전을 건져 올리려는 사람. 전자는 부, 명예, 욕망, 성공을 얻기 위해 매진하는 사람이고 후자는 그런 외향적인 성공에 관심이 없으면서 내면에 숨어 있는 자아와 영성을 우선하는 사람이다...” (p.294, <꿈, 진정한 자아를 비추는 거울, 신화학자 고혜경> 중)
장정일 / 장정일, 작가 : 43인의 나를 만나다 / 한빛비즈 / 329쪽 / 2016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