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에 의지하여 가끔 넘겨다 보게 되는 '깨끗한 더러움'...
“천사가 있다면 상한 정신 안에 살고 있으리라. 어렸을 적 우리 집에 얹혀살던 바보 고모는 언제나 왼쪽 신을 오른발에, 오른쪽 신을 왼발에 신고 다녔다. 종생토록 그 버릇 고쳐줄 수 없었다. 천사는 그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어린 나를 업고 다녔다.” (p.14)
시인의 산문집은 산문으로도 운문으로도 읽힌다, 읽을 수 있다. 손가락 사이사이 문장에 깍지를 끼우고 있어도 좋고, 탈수된 빨랫감의 마지막 물기를 펄럭펄럭 털어 내도 좋다. 그렇게 날아간 줄 알았던 물기가 제 얼굴로 다시 튀어 오를 때 느끼게 되는 싱싱함이란 것도 있는 법이다. 그렇게 야물게 엉켜 있는 줄 알았던 문장들이 꼼지락꼼지락 제 새로운 의지를 드러낼 수도 있는 법이다.
“학교 공부 열심히 하는 것과 책을 읽는다는 것이 / 똥과 변기만큼 가까울 것 같지만 사실은 / 사람과 귀신 사이만큼이나 멀다. / 요즘 내 얘기. 머나먼 책.” (p.41)
시인의 시를 단 한 편도 읽지 않고, 건너뛰어 산문집을 읽고 있어 면구스러운 마음을 어찌어찌 털어낸다. 생각해보면 시를 읽는 것과 산문을 읽는 것은 ‘똥과 변기만큼 가까울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람과 귀신 사이만큼이나’ 먼 읽기는 아닐까, 라는 나의 지레짐작은 그야말로 지레짐작인 것은 아닐까.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나는 얼마 뒤 시인의 시집을 한 권쯤 읽게 될 수도 있다.
“저물어 집에 돌아와서는 / 구두를 벗어 던지고 제 발을 슬퍼하는 사람이 있고, / 부르튼 발을 벗어 던지고 구두를 슬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 발이 더 수고했나 구두가 더 수고했나, 헷갈려서 / 갸우뚱거리는 사람도 있겠지.” (p.96)
산문집은 잠언, 감시, 시화라는 세 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잠언 챕터의 글은 일상생활에서 반듯하게 길어 올린 시인의 생각들인데 몇몇 곳에서 옳거니 하게 된다. 감시 챕터의 글에는 사회를 바라보는, 특히나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시인의 격앙됨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누구인들 그러지 않을까. 시화 챕터의 글들은 현직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는 시인의 일종의 짧은 시론 모음이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쓰려면 정확한 문장을 써야 한다. 그래야 ‘다른 문장’을 쓸 수 있다. 반듯하고 흠 없는 문장은 정확한 문장이 아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비튼 문장도 시의 문장은 아닌 듯하다. 시의 문장은 어떤 ‘최대한의 문장’이다. 그것은 한사코 문장이 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문장에 가깝다. 영원히 달아나는 문장이고 문장이기를 포기하려 하는 문장이다.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말을 종이 위에 눌러놓아도 꿈틀거린다는 뜻.” (p.162)
조금은 헐렁하다 싶은 편집이지만 몇몇 문장들이 야물어서 모른 체 넘어가기로 한다. 자유의 극대를 지향하지만 그만큼 아니 그래서 더더욱 ‘정확한 문장’으로만 뚫고 나아가야 하는 시와 우리 사이의 맥락을 시인은 지적한다. 사랑 없는 허무주의라는 ‘가장 큰 적’에게 언제나 제 곁을 내어주는 시인들의 원죄와 같은 허망함에 대하여 시인은 조심스럽게 부끄러움을 표명한다.
“이해받기 위해 시를 쓰는 건 아니다. 인정받기 위해 쓰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아예 펜을 들 수가 없어진다. 나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허무주의가 삶에서 부끄러움을 빼앗아간다. 허무주의엔 사랑이 없다. 이 가장 큰 적이 시인들 곁에 늘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죽어서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허망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남의 입에서조차 사라진다면 그건 더욱 허망한 일이다.” (p.199)
어떤 결의를 가지고 쓴 글들이 아니기에 독자도 마음에 날을 세워 읽을 필요가 없다. 보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보아서 나쁘지도 않은 글들이다. 시인의 지친 마음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오래 전 말빚을 갚는 심정으로 책을 낼 수도 있다, 시인이니까. 어느 술자리 선배의 말을 제목으로 가져와도 괜찮다, 시인이니까. 신 앞에 평등하듯 시인 앞에서 평범해지는 나 또한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 시인에 의지하여 가끔 ‘깨끗한 더러움’의 상태를 넘겨다 볼 뿐...
“안 되면 괴로워하고, 되는 듯하면 좋아라 하며 시를 써왔지만, 언제나 넋을 잃을 때가 가장 좋았다. 제 작업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정신을 잃고 만다는 건 사실 시인의 곤란이기도 하다. 인간들의 공동체에서 함께 살려면 최대한 정신을 가누어야 하니까. 정신을 잃는 것은 시의 윤리이고, 정신을 차리는 건 삶의 윤리일 텐데, 이 둘이 하나 되는 어느 순간에 시의 새로운 말들이 태어나지 않을까. / 마음이란 걸 가졌기에 인간은 누구나 장애를 앓고 있다. 날때부터 인간은 때가 묻게 마련이다.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 나라는 장애자가 시를 의지하여 어떤 ‘깨끗한 더러움’의 상태에 닿기를.” (p.245)
이영광 /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 / 이불 / 246쪽 / 2015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