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존재에 대한 호기심과 의구심으로부터 많은 소통이 시작되리니...
이해하고자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최선을 다하여 최대한 많은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따름이다. 게다가 이러한 이해의 욕망을 부추기는 이해의 대상에 우리 인간 개개인이 버티고 있으니,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더욱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김대식의 책 《빅 퀘스천》은 이처럼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것, 그것들 중에서 특히 어려운 것,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더욱 퀘스천을 던지게 되는 일련의 물음들의 모음이다.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우리는 왜 먼 곳을 그리워하는가, 원인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친구란 무엇인가, 삶은 의미 있어야 하는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가, 운명이란 무엇인가, 영혼이란 무엇인가...
진실은 존재하는가, 인간은 무엇을 책임질 수 있는가, 우리는 왜 정의를 기대하는가, 민주주의는 영원한가, 로마는 정말 멸망했는가, 왜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는가, 인간은 왜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소유란 무엇인가, 가축은 인간의 포로인가...
우리는 왜 사랑을 해야 하는가, 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 시간은 왜 흐르는가, 인간은 어떻게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가, 만물의 법칙은 어디에서 오는가, 노화란 무엇인가, 정보란 무엇인가, 마음을 가진 기계를 만들 수 있는가, 인간은 기계의 노예가 될 것인가, 인간은 왜 필요한가
책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쩌면 바로 이러한 물음들의 인덱스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물음들의 해답을 이 책에서 구할 수는 없다. 이 책은 물음의 책이지, 해답의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중 <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챕터에서 한동안 멈춰 섰다. 이슬람 극단주의자에게 잡혀 참수당한 대니얼 펄의 죽음을 향하여, 도대체 왜, 라는 질문을 가지게 된 (세계 최고의 논리학자이자 수학자이기도하였던) 대니얼의 아버지 주데아 펄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챕터였다. 그리고 그 챕터의 마지막에는 이 죽음을 (우리의 존재는 반복될 수 없으므로)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다르고 만다.
“오랑우탄, 침팬지, 고릴라, 호모 사피엔스, 영장류 중 하나인 인간은 사회적 집단에서 생활한다. 뾰족한 이빨도, 두꺼운 피부도, 날개도 없이 나약하기 짝이 없는 동물 영장류는 혼자서 생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뇌가 작은 명주원숭이Marmoset는 10마리 안팎의 무리와 함께 살지만, 대뇌필질이 큰 침팬지들은 100마리에 가까운 구성원들과 함께 복잡한 사회구조를 유지한다... 영장류 집단에서 얻은 데이터를 인간의 뇌 사이즈에 적용하면 우리 인간의 ‘생물학적’ 집단 구성원 수는 약 150명 정도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원래 인간은 그 정도 수의 ‘친구’들과 함께 사는 것이 적절하다는 말이다...” (p.54, 친구란 무엇인가 중)
그야말로 ‘빅’ 퀘스천이기만 한 물음들이 등장하는 탓에 우리는 그리고 저자는 그것에 대한 구체적이거나 단 하나뿐인 답변을 제공하는 일에서 자유롭다. 어쩌면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렇게 거대하고 모호한 물음들 그리고 낯설고 애매한 답변들로 가득한 책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섣부르게 다가갈 수 없었던 근원적인 질문들을 이렇게 한꺼번에 모아놓은 책은 흔치 않다.
“... 하버드대학의 스티븐 핑거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에서 이야기했듯, 오랜 시간 폭력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인류는 계몽과 산업화를 거치면서 점차 폭력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 21세기에는 매일 약 15만 명 정도가 죽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3분의 2, 선진국 중에서는 90% 이상이 비폭력적인 ‘자연적 노화’로 죽는다...” (p.93,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가 중)
책을 읽고 나면, 그러니까 이러한 ‘빅 퀘스천’들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두뇌 훈련을 실컷 한 느낌이 든다. 우리들 주변에 산재해 있는 것들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를 주워듣는 재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 커다란 퀘스천 마크에 짓눌려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대중적인 화법을 유지하려 한 저자의 노력 덕분에 (저자는 이런저런 강의 및 신문 칼럼 연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다.
“어쩌면 ‘나’라는 존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들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선택이라는 실질적 점들을 연결해 그린 가상의 ‘선’이 바로 ‘나’라는 존재이며, ‘나’라는 허상은 ‘선택의 자유’라는 그럴싸한 ‘스토리’를 통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선택들을 연결한 가상의 선이 바로 ‘나’라면, 어쩌면 인류의 모든 선택들을 연결한 가상의 선이 ‘운명’일 수도 있겠다. 이런 말도 가능하겠다. 운명은 존재의 본질적 우연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약한 인류가 다 함께 꾸는 하나의 꿈이라고.” (pp.104~105, 운명이란 무엇인가 중)
책에 실린 많은 물음들 중 많은 것들은 결국 자기 자신과의 소통을 위한 촉매제로 작동할 수도 있겠다 싶다. 소통의 부재에 대해 수없이 비난하는 우리들, 그러나 우리들 자신 또한 결국 자신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지 않은지 우려를 하게도 된다. 제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나 의구심을 여백으로 둔 채, 이런저런 관계의 불통에 대해 호통만 치는 사회는 어딘가 공허해 보이지 않을까...
김대식 / 김대식의 빅퀘스천 : 우리 시대의 31가지 위대한 질문 / 동아시아 / 320쪽 / 2014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