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가까워 우리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국가주의를 거부하는데 보탬이 될
《시의 힘》은 한국작가회의에서 선정한 2015년 올해의 책이다. ‘詩’의 힘이라는 제목과 작가들이 선택했다는 점에서 선뜻 마음이 움직였다. 시와 시를 쓰는 사람들을 향한 어떤 경외는 내 삶에서 결코 누락되지 않는 무엇이다. 일상과 그 일상이 드리운 그늘 아래로 웅크려버린 마음 탓에 시를 읽지 않고 지낸지 어언 두어 달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간접적으로나마 시에 접촉하게 해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나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pp.110~111)
하지만 책의 초반부, 나는 좀처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던 것 같다. 여러 시인들이 거론되고 있고 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문학의 내부로 침잠하기 보다는 문학의 외부로 확장되기 일쑤였다. 일종의 詩論을 기대하였으나 글은 時論에 가까웠다. 아니 몇몇 시를 통해 살펴보는 인문학서라고 보는 편이 낫다.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한국인으로 일본어로 저술 활동을 해야 하는 그의 이력은 독특한 시각을 만들고 독자를 자극한다.
“‘고향’에 대한 애착을 ‘국가’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하는 것은 너무 엉뚱한 비약이다. 어떤 사람이 일본 오카야마 현 산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그 마을을 사랑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마을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것을 자동적으로 일본국에 대한 사랑으로 읽어야만 할 이유도 없다. 또 어떤 사람이 조선 반도 남서부 호남 지역의 농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동적으로 그 마을을, 나아가 ‘대한민국’을 사랑해야만 할 이유는 없다. 그렇건만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많은 이들이 이런 비논리적인 연속성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p.242)
사실 저자인 서경식은 군부독재 시절 재일한국인으로 유학을 왔다가 간첩죄로 오랜 시간 영어의 신세가 되었던 서승과 서준식의 동생이다. 책의 전반부와 후반부에는 그와 그의 가족이 겪은 일들이 종종 등장한다. 조국에 대한 강한 마음의 끌림을 가지고 떠났던 형들이 감옥에 갇히고 그들을 돌보기 위해 글도 못 읽는 어머니가 한국을 들락거려야 했고, 그러한 어머니와 형들을 바라봐야 했던 그는 어떠한 생각들을 하며 공부를 했고, 글을 써야만 했을까, 싶다.
“... ‘어머니의 사랑’은 만인에게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 진실일까? 그것은 ‘가족애’와 같은 것일까? 또한 가족애는 향토애와 무조건 연결될까? 다시 말해 부모 사랑=가족애=애향심=애국심이라는 등식은 정말 성립할까? ... 우선 개인적 의문을 말하자면, 이러한 등식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어째서 ‘애국심’에서 이 등식을 끝내는지 궁금하다. 이 등식 뒤에 ‘인류애’나 ‘세계애’, ‘평화’라는 가치를 상정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 나의 추론으로는, 이런 등식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개인→가족→향토→국가(→세계)라는 방향으로 하나하나의 등식이 성립되는지 음미하면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출발하여 국가→향토→가족→개인이라는 역방향으로 ‘애국심’의 이유를 만들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pp.248~249)
그리고 이런 그의 가족사는 오히려 그의 품을 넓게 만들었다. 비록 시가 등장하지 않지만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일곱 번째 챕터인 ‘패트리어티즘을 다시 생각한다’이다. 그는 이 챕터를 통해 일본과 한국에 공히 만연해 있는 그리고 점차 그 세력을 넓혀가는 그래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사상의 영토를 회복해가는 것처럼 보이는 (일본과 한국은 서로를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를 닮아 있다. 아베와 박근혜를 욕할 필요가 없다. 그들을 뽑은 것은 우리이고 그들이다.) 국가주의를 살피고 있다.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나는 가족 상호 간의 ‘사랑’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태어난다’라는 말을 영어로 ‘I was born’이라는 수동형으로 표현하듯, 인간은 아무도 자신의 의사로 이 세상에 터어나지 않는다. 아이는 (즉 인간은 누구나) 자발적 의사와 관계없이 가족이라는 사회에 편입한다. 이런 부조리에 의해 주어진 자신의 삶을 의미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가족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사랑해야만 한다’라는 이데올로기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족이 그 구성원에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I was born’이라 말하듯 태어난 아이는 절대적 무방비 상태라 부모나 가족(넓게 말해 어른)의 보호 없이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실제 혈연관계가 있든 없든 어른들에게 어린이를 보호할 책임이 있는 것은, 그것이 인류 사회를 유지해가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는 무방비하기 때문에(어떤 시대, 어떤 상황에서는 여성이나 노인도 마찬가지지만), 성장할 때까지는 어른에게 의존해야 한다. 여기서 권력관계가 생긴다. 원래는 사회적 단위의 구성원 전원에게 필요해서 생겼을 가족적 유대가 권력관계라는 형태를 띠는 것이다. 아이, 노인, 여성 등 가족 안의 약자에게 가족이라는 관계가 이탈하기가 극히 어려운 구속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일가의 ‘가장’에게 가족이란 자신이 확실하게 지배할 수 있는 집단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국민은 하나의 가족’이라거나 ‘피를 나눈 우리’와 같은 식으로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가족관계나 혈연관계에 비유하는 것은, 구성원 각자의 자발적인 참가를 전제로 해야 할 사회 조직을 마치 ‘운명 공동체’인 양 묘사하여 구성원들을 권력관계로 묶어둘 위험을 내포한다.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가족이라는 것이 각 개인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적 단위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해야 한다... 다 자란 아이가 스스로 판단하여 자기가 속한 (가족이라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과, ‘효(孝)’라는 도덕률에 숨은 권력관계에 떠밀려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겉모습은 비슷할지 몰라도 전혀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효’를 ‘충(忠, 주군에 대한 충의)’으로 바꿔놓고 보면 같은 구조가 보인다. 국가에 대한 ‘충’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가족에 대한 ‘효’를 본질화한다. ‘충효’라는 슬로건은 유신독재 시절에 강조되었는데, 당시 전국의 교도소에는 ‘충효비’가 서 있었다.” (pp.253~255)
이 책 전체를 읽지는 않더라도 가능하다면 이 일곱 번째 챕터만큼은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다. 개인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의구심을 품지 않고 혹은 의구심조차를 비윤리적인 것으로 만들며 성장하는 효와 충이 어떤 식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우리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저자는 글을 통하여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우리가 그저 연원으로 받아들이는 어떤 것에 과감히 상처를 입힌다.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타자에게 헌신할 것이라 기대해도 좋다고 단언할 만한 근거는 없다. 개개인의 자발성에 맡겨두면 저절로 세상은 더욱 나아질 것이라고 낙관할 근거도 없다. 하지만 그것을 ‘위로부터’의 이데올로기나 규범으로 정하는 순간, 개인의 자발적인 행위는 권력에 의해 날치기당해 이용된다는 것만은 확언할 수 있다. 그 위험성에 최대한 민감하고자 깨어 있는 것만이 국가주의에 저항하는 길이다... 인류사의 현 단계에서 우리는 아직 국가와 인연을 끊을 수 있을 법하지 않다. 국가는 당분간 우리 세상에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만 국가의 전횡과 폭주를 막고, 인간 사회를 보다 나은 것으로 바꾸어가려면, 개개인의 존엄을 최대한 존중하고 그 다양한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연대하며 국가를 견제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p.263)
詩가 정말 힘을 가질 수 있느냐, 지금이 그러한 시대이냐, 그렇게 詩와 時는 불화이든 조화이든 공존 가능한 것이냐 하는 잡다한 생각들이 불러일으키는 마음들로 책을 집어 들었지만 詩 보다는 지금 우리의 時를 더욱 깊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사실 그래서 부제에 등장하는 ‘절망의 시대’라는 표현에는 십분 공감하면서도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이라는 물음은 책의 테두리를 슬쩍 넘어서고 있다는 느낌이기도 하다. 어쨌든 견제해야 할 국가가 너무 가까이 있어 우리의 시야를 가로막고 절망케 하는 시대, 그래서 기댈 수 있는 어떤 것에든 기대어 구원을 받고 싶은 시대이다, 지금은...
서경식 / 서은혜 역 / 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 현암사 / 295쪽 / 2015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