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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장석주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시간에 대한 감각의 차이를 극복하며 걸어가게 될...

by 우주에부는바람

“우리는 새벽의 나무 둘처럼 / 행복합니다 / 잉걸불 속으로 들어가는 한 쌍의 단도처럼 / 용감합니다.” (p.12, 박연준)


박연준의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과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를 예민하게 차오르는 흥분과 함께 읽었던 좋은 기억이 있다. 작년 봄에 읽은 작가의 산문집 《소란》 또한 나쁘지 않았다. 당시 나는 막 잠실에서 녹번으로 이사를 온 참이었고, 몸과 마음이 소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러한 시인 박연준이 장석주와 함께 산문집을 냈다. 두 사람은 한때 스승과 제자였고, 둘 사이에는 25년이라는 나이차가 존재한다.


“우리는 똑같은 시간을 부여받지만 시간 감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특히 나이에 따라 생체 시계의 속도가 달라지는데, 어린애의 시간은 느리고, 나이가 많아지면 시간은 더 빨리 흐른다. 6세 아이의 하루는 인생 주기의 기준에 2,190분의 1에 해당한다. 하지만 60세 어른의 하루는 21,900분의 1이다. 어린애의 하루는 생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어른은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니까 하루의 비중은 미미한 것으로 축소된다. 그러니 시간 감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p.162, 장석주)


장석주는 시인이자 문필가이다. 다양한 장르의, 그러니까 거의 모든 장르의 글을 쓰고 있지 않나 싶다. 장석주의 글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그가 운영하던 출판사 청하에서 나온 책들을 즐겨 읽던 시절이 있었다. 장 그로니에의 《섬》이나 볼테르의 《캉디드》,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 그리고 니체의 책들을 청하에서 나온 것들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최근에는 장석주의 시집 《몽해항로》를 읽었다.


“대개 사랑은 콩깍지가 씐 상태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은 콩깍지가 벗겨졌는데, 그것도 한참 전에 벗겨졌는데도 그 사람이 좋은 것이다. 모든 단점들을 상쇄시키는 것, 이해 불가능한 상태가 사랑이다... 나는 그의 나쁜 점을 열 개 이상 말할 수 있지만(정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한다. 반면에 가장 좋은 점이 뭐냐고 물으면 쉽게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단순하게 말할 수 없고, 그냥 좋은 것이다. 좋은 이유는 말할 수 없고, 나쁜 점은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는 데도 그 사람이 좋은 것. 비논리적이고 납득할 수 없는 사태...” (p.52, 박연준)


그리고 박연준과 장석주는 십여 년 동안의 연애 기간을 거쳐 이제는 부부가 되었다. 출판사는 이 책을 ‘글이 만들어낸 결혼’, ‘책이 거행시켜준 결혼식’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책의 편집인인 김민정은 박연준을 피를 나누지 않은 동생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시드니에 함께 도착하고, 주인들이 긴 여행을 떠난 집을 근거지로 삼아 한 달여의 시간을 함께 보낸다.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는 그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 서울에서는 벽과 찬장을 바라보며 설거지를 했었는데, 이런 호사가! 설거지를 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가끔 싱크대 앞 창가에 죽어 있는 파리를 보았다. 날벌레들은 왜 꼭 배를 뒤집은 채 죽는 걸까. 아이고 나 죽네, 하며 나 뒹구는 걸까? 그후에도 파리는 창가와 와서 죽었고, 설거지를 마치면 죽은 파리를 몇 번이나 치워야 했다.” (p.25, 박연준)


두 사람의 많은 나이차는 아마도 두 사람이 하루를 대하는 시간의 길이에도 차이를 만들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제 꽤 어른인 장석주에 비해 아직 꽤 젊은 박연준의 시간은, 그 시간에 대하 감각은 다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서 박연준은 길게 놓인 시간을 잘 참지 못하는 것만 같다. 그녀는 끊임없이 움직이려고 하고 그는 그 시간에 되도록 맞춰 주려고 하는 것 같다. 두 사람은 간혹 다투기도 하지만 이제 콩깍지가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사랑하는, 오히려 그래서 크게 애쓰지 않아도 사랑하는 그들은 무난히 그 시간들을 통과해낸다.


“많이 다니지 않았는데 금세 피곤해졌다. 전날 밤 여기도 가고 싶고, 저기도 가고 싶다며 한껏 들뜬 나에게 JJ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네가 아무리 많이 보려 해도 이곳에 사는 사람만큼 많이 보고, 많이 알 수는 없어. 뭘 보려 하지 말고 그냥 거기 있는 순간을 즐겨...” (p.72, 박연준)


박연준의 글에서 자잘한 생동감이 느껴진다면 장석주의 글에서는 좋게 말하여 느림이 느껴진다. 솔직히 말해 장석주의 글에서는 어떤 귀찮음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딱히 그곳으로 가지 않았어도 쓸 수 있었을 그런 글들만 같다. (그리고 아주 많은 부분 장석주는 다른 이의 글을 인용한다) 박연준에게는 생경한 것들이 장석주에게는 그다지 생경한 것들로 비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다시 한 번 뒤집어 보자면 박연준이 무언가를 보고 쓰려고 하는동안 장석주는 그냥 그 순간을 오롯이 즐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 심심한 시간은 그냥 심심하기만 한 게 아니다. 심심함 속에서 잊었던 것들이 되살아나고, 사라진 것들이 부활한다. 심심한 시간들은 죽은 것들을 되살리고, 잃었던 것들을 다시 돌려주며 감미로운 감각들을 맛보도록 했다. 시드니의 유칼립투스 숲과 공원들, 푸름에 물든 하늘과 바다, 청명한 날씨들, 롱블랙 커피, 달링 하버를 걷던 시간들, 우리를 환대했던 사람들...” (p.220, 장석주)


시드니와 그 일대를 거니는 이 문학적인 커플을 약간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책이 일종의 청첩장이라면 잠시 그 결혼식에 다녀온 것일 수도 있겠다. 그 결혼식이 조금 길게 그리고 저기 먼 시드니에서 치러진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이것이 일종의 여행기를 겸한 산문집이라는 측면에서는 조금 미진하다. 대신 내가 좋아라하는 빌 브라이슨의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 여행기》를 샀으니 뭐 그래도 괜찮다...



박연준, 장석주 /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 난다 / 221쪽 / 20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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