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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우물에서 하늘 보기》

시대를 바라보는 창, 혹은 그 야만의 창틀의 쇄신을 바라는 시비평...

by 우주에부는바람

2014년 황현산 선생이 ‘황현산의 우물에서 하늘 보기’라는 제목으로 실었던 시화 詩話 들을 엮은 산문집이다. 그 시간이 겪은, 그 시간의 우리들이 겪은 혹은 우리들의 야만성으로 그 시간들이 겪은, 그 시간들의 야만성으로 인하여 우리들이 겪은 무엇들이 군데군데 박혀 있는 산문집인 것만 같다. 그래서 산문집 안의 비평의 대상은 시대였다가 시였다가 곧 우리들의 세상이 되고는 한다.

“... 우리는 또다시 시대의 악을 세상의 풍속으로 여길 것이고, 거기서 오는 불행을 운 없는 사람들의 횡액으로만 치부할 것이며, 참화는 또다시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전란을 만난 것도 아니고 자연재해에 휩쓸린 것도 아니다. 싸워야 할 적도, 원망해야 할 존재도 오직 우리 안에 있다. 적은 호두 껍데기보다 더 단단해진 우리의 마음속에 있으며, 제 비겁함에 낯을 붉히고도 돌아서서 웃는 우리의 나쁜 기억력 속에 있다. 칼보다 말이 더 힘 센 것은 적이 내부에 있을 때 아닌가...” (p.102)

한동안 잊고 지내던 시 읽는 나,를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몇 해 전부터 그래서 시를 간간이 꺼내 읽고는 한다. 읽었으나 잊고 있었던 시인들을 다시 꺼내 읽기도 하고, 모르고 지나갔거나 지나갔을 시인들을 찾아내 읽기도 한다. 그리고 시를 읽는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구분되는 지점이 있다면 시를 해석하려는 머리가 아니라 시를 품으려는 마음 쪽에 더 가까이 서게 되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 시에서 무의미란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특정한 의미에 붙잡히지 않는다는 뜻이 되어야 할 것이다.” (p.245)

그렇게 시를 읽으면서 종종 마음에 드리운 어두움을 걷어낼 수 있었다. 때때로 야만스러운 시대를 향한 저주 같은 것이 떠오르는 마음 또한 자제시키고는 하였다. 어쩌면 황현산 선생 또한 그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신문에 실린 그래서 책에도 실린 칼럼들은 그러한 선생의 마음의 어떤 편린들이리라.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편린들을 함께 공유함으로써 그 치유와 위안의 단초들 또한 공유하는 것이리라.

“시 쓰기는 끊임없이 희망하는 방식의 글쓰기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시가 말하려는 희망은 달성되기 위한 희망이 아니라 희망 그 자체로 남기 위한 희망이다. 희망이 거기 있으니 희망하는 대상이 또한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 희망이다.” (p.262)

그렇게 지금 우리를 들여다보기 위하여 선생은 많은 시인과 시들을 산문에 끌어들인다. 조금 열심히 그 리스트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육사의 <광야>,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 김수영의 <꽃잎>, 보들레르의 <이방인>, 진이정의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정현종의 <섬>, 유치환의 <울릉도>, 백기완의 <묏비나리>, 김종삼의 <민간인>, 야니스 리초스의 <부재의 형태>,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노래>, 박노해의 <그대 나 죽거든>, 공무도하가, 한용운의 <당신이 가신 때>, 앙리 미쇼의 <거대전투>, 보들레르의 <길 떠나는 집시>, 이성복의 <래여애반다라>, 한용운의 <사랑의 측량> 과 <이별은 미의 창조> 와 <거문고를 탈 때>, 박정만의 <우리들의 평화주의 5>, 최승자의 <기억하는가>, 정화진의 <박우물> 과 <고요한 동백을 품은 바다가 있다>, 백석의 <오금덩이라는 곳> 과 <고야> 와 <노루>, 윤극영의 <반달> 과 <고기잡이> 와 <꽃길>, 이용악의 <오랑캐꽃> 과 <강가> 와 <그리움>, 김춘수의 <눈물> 과 <대지진>, 황진이의 <영반월 詠半月>, 서정주의 <석류개문 石榴開門>, 유치환의 <깃발>, 랭보의 <야만인>.

“산문은 이 세계를 쓸고 닦고 수선한다. 그렇게 이 세계를 모시고 저 세계로 간다. 그것은 시의 방법이 아니다. 시가 보기에 쓸고 닦아야 할 삶이 이 세상에는 없다. 시는 이를 갈고 이 세계를 깨뜨려 저 세계를 본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무정하다는 것이다.” (p.271)

생각해보니 내가 이제 시에 대한 해석을 잘 읽지 않는 것은 시가 가지는 ‘무정한 아름다움’이 산문이라는 형태의 해설로 인하여 무너지는 것을 보기 싫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시의 방법’으로 세상을 보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산문에게는 산문의 방법이, 시에게는 시의 방법이, 시인에게는 시인의 방법이, 비평가에게는 비평가의 방법이, 그러니까 이 세계가 바라다 보이는 더럽혀진 창을 씻어낼 방법이 혹은 그 창을 끼우고 있는 낡은 틀을 바꿔낼 방법이 있을 터이다. 그렇게 어떤 이들에게는 ‘시의 방법’이 으뜸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책에 거론된 시인들에게는...


황현산 / 우물에서 하늘 보기 : 황현산의 시 이야기 / 삼인 / 271쪽 / 20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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