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기원』은 이론물리학자 토마스 헤르토흐가 스승인 스티븐 호킹과의 연구를 다룬 도서다. 이 책은 저자 헤르토흐보다 호킹의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을 스티븐 호킹의 유작이자, 그를 사랑한 제자가 바치는 헌정 도서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저자는 호킹이 발견한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글을 전개한다. 때로는 합심하여 발견한 아이디어마저 호킹의 공으로 돌리는 것을 보면, 스승을 향한 그의 애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솔직히 말해 스티븐 호킹은 내가 좋아하는 물리학자는 아니었다. 나는 호킹을 그가 1988년에 집필한 『시간의 역사』로 처음 접했는데, 당시 책에서 발견한 그의 과학관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일개 일반인이 물리학계의 거장인 호킹의 과학관을 비판한다며 비웃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호킹이 이룩한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5년 전『시간의 역사』를 읽은 시점을 기준으로, 호킹의 과학관은 다소 보수적이고 편협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실제 천재의 대명사인 아인슈타인조차 보수적 과학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죽는 순간까지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부정했다. 그러나 코펜하겐 해석은 현재 양자역학의 주류 해석으로 자리 잡았으며, 실제로 물리학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토마스 쿤이 말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도약인 셈이다. 실제 코펜하겐 해석은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을 구분 짓는 핵심 척도 중 하나이다. 그러니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이다. 엄청난 성과를 이룩한 인물이라고 해서, 그 인물의 과학관이 무조건 옳을 것이란 추측은 후광 효과로 인한 오류라는 것이다.
내가 『시간의 역사』에서 호킹에게 동의할 수 없었던 지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호킹은 과학과 철학을 분리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난관에 봉착했을 때, 철학의 필요성을 시사한 제자에게 "철학은 죽었다"라며 일축했다. 하지만 나는 호킹의 대답에 한 가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호킹의 연구 대부분은 양자역학에 기반한다. 심지어 호킹 자신이 발견하여 학계를 뒤흔든 '호킹 복사'도 양자역학적으로 설명되는 이론이다. 호킹 복사는 블랙홀이 '아무것도 빠져나올 수 없는 무한 밀도의 쓰레기통'이 아니라, 열복사를 통해 일부 정보를 방출하는 천체임을 증명한다. 호킹 복사는 사건의 지평선에서 발생하는 양자 요동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양자역학적으로 설명되고 계산되어야 한다.
문제는 이 양자역학이 과학과 철학의 간극 사이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당시 고전물리학은 입자와 파동을 공존할 수 없는 대립 관계로 간주했다. 그러나 실험 결과는 입자가 곧 파동이자, 파동이 곧 입자임을 보여주었다. 물리학자들은 이런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연구했지만, 고전물리학의 관점으로는 해결할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이때 코펜하겐 해석이 구원 투수로 등장한다. 양자역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닐스 보어와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고전물리학의 언어로는 설명될 수 없는 미시 세계를 철학의 언어로 풀어 나갔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이다.
실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저서 『부분과 전체』와 『물리와 철학』에서, 양자역학의 모순 해결에 철학이 적극 개입했음을 표명한다. 그뿐만 아니라 닐스 보어는 귀족 작위를 받은 후 문양을 만들 때, '대립하는 것은 상호 보완한다'라는 라틴어 문구와 함께 태극 마크를 삽입했다. 이는 대립하는 것은 인간의 개입으로 인한 구분일 뿐, 실제로는 서로의 존재를 보완한다는 철학의 관점을 수용한 것이다(근대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나니체와 더불어 수많은 철학자가 이와 유사한 관점을 고수했다). 쉬운 예를 들자면, 동전의 앞면과 뒷면의 관계를 들 수 있겠다. 우리 인간은 직관적으로 각 면을 대립 관계로 구분하지만, 실제 두 면은 서로를 보완한다. 둘 중 어느 한 면이라도 각인되어 있지 않다면, 그 동전은 동전의 역할을 상실한다. 바로 이런 철학적 사고관이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닐스 보어의 귀족 문양
하지만 호킹은 자기 이론의 뿌리에 철학이 자리함에도 과학과 철학을 은연중 분리했다. 양자 물리학자는 양자 물리학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고전적 과학관에 얽매여 고집을 부렸던 아인슈타인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게 된다. 호킹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는 아인슈타인의 고집처럼, 오로지 과학만으로 세상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는 마치 자판기에 한쪽 면만 각인된 동전을 넣는 꼴이나 다름없다. 백날 넣어봐라. 자판기가 작동하나.
내가 호킹에게 동의할 수 없었던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인간의 객관성에 유독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는 첫 번째 이유와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철학은 인간의 인식이 결코 주관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양자역학은 관측이라는 행위가 과학적 객관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현대물리학에서 인간의 주관성은 객관성과 불가분의 관계이며, 두 개념은 서로를 배제하고는 성립이 불가하다. 이미 시공간의 상대성과 파동-입자의 이중성은 충분히 입증되고 합의되었으며, 이는 곧 객관의 영역으로 여겨진 과학도 주관의 영역에 한 발을 걸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주관성을 옆으로 밀어둔 채 객관성에만 치중하는 호킹의 과학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간의 주관성은 연구 분야와 무관하게 선택이 아닌 필수 고려 사항이기 때문이다.
관측이라는 주관적 행위는 객관적 결과에 반드시 개입한다. 이는 인문학과 철학에선 일찍이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한나 아렌트는 이를 강조하며 자연과학계에 경종을 울렸다), 이를 부정해 오던 물리학계에서도 충분히 증명되고 보편화되었다. 그렇다고 주관성이 객관성에 앞선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과학과 철학을 한 데 엮은 것처럼, 객관과 주관 또한 한 데 엮일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물리학계에서도 두 개념의 상보성이 밝혀진 지 반 세기가 넘었다. 그럼에도 주관성이 배제된 객관적인 절대 진리를 포착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이 물리학계에 여전히 퍼져있다.
『시간의 역사』에서 마주한 호킹 또한 이런 과학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책에서 그는 인간을 보잘것없는 먼지와 같은 존재로 상정한다. 일견 타당한 주장이다. 객관적인 시야로 인간을 바라보면, 우주라는 거대한 기계 안에서 비참할 정도로 무의미한 존재이다. 인간을 인간 밖에서 바라보면-즉 신의 눈으로 바라보면-, 우리 인간은 찰나의 순간에 찰나의 삶을 누리는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의 시야 밖에서 자신을 보는 것이 가능할까? 장담하건대, 우리는 인간은커녕 우리 자신의 시야조차도 벗어나지 못한다. 호킹은 그 자신마저도 주관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면서, 과학적 객관성만으로 세상의 베일을 들추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과학과 철학, 그리고 객관과 주관을 분리하는 호킹의 과학관을 나는 신뢰할 수 없었다. 호킹의 과학 이론에는 인간이 없었다. 물론 이것이 호킹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의도와는 별개로 그는 불가분의 개념들을 분리했다. 혹자는 반박할 것이다. "『시간의 역사』에서 호킹은 인간의 가치에 대해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개인의 사고관을 명확하게 알기 위해선 그의 언어가 아닌 행동을 봐야 한다. 호킹의 일상 영역엔 '인간'이 중심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과학 영역엔 '인간'은 들러리에 불과했다. 호킹의 과학관을 들추어 보면, '인간'의 가치가 배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수년이 흐르고 그의 제자가 집필한 『시간의 기원』을 읽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겠다. 이 책을 덮고 난 후, 호킹을 향한 내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호킹은 『시간의 역사』 집필을 마치고 시간의 기원을 밝히기 위한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다 자신의 기존 과학관으론 더 이상 진전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에겐 사고의 전환이 필요했다. 호킹은 여행 중이던 제자 헤르토흐를 급히 불러 새로운 시야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제자는 스승에게 말한다. "이제 철학의 시간이군요." 호킹은 옅은 미소로 화답한다.
2. 나의 오해
우선 나 자신을 변호할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야겠다. 나는 호킹을 『시간의 역사』에서 처음 접한 후 그의 논문이나 책을 접한 적이 없다. 즉, 내가 알고 있는 스티븐 호킹은 1988년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시간의 역사』가 세상에 나온 지 거의 40년이 흘렀다. 40년이면 한 사람의 가치관이 바뀌는 데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하지만 나는 40년 전 호킹의 과학관에 실망한 나머지, 더 이상 그의 갱신된 과학 이론을 살펴보지 않았다. 보수적이고 융통성 없는 가치관을 비판하면서, 나 또한 똑같은 행동을 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나의 불찰을 인정해야지만 다음 글을 전개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있다. 그의 엄밀한 철학적 사고방식도 좋았지만, 그보다는 철학을 대하는 그의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전기작인 『논고』에서 논리실증주의 즉, 객관적 논리로 풀어낼 수 없는 것들의 무의미함을 강조한다. 그는 『논고』의 말미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철학에 사망을 선고한다. 하지만 논리 또한 인간의 산출물이기 때문에 주관성을 배제할 순 없다. 다시 말해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는 객관적으로 증명된 논리만이 아니다. 어쩌면 실제 세상은 개개인의 주관성에 기댄 비논리적 요소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논고』의 결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내가 원했던 결말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후기 저서인 『탐구』에서 자신의 과거를 전복한다. 더불어 객관적 논리를 갖추지 못한 일상 언어에는 아무런문제가 없음을선언한다. 비트겐슈타인의 객관적 세계에 드디어 '인간'이 들어선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매개로 맥락 안에서 주관적 의미를 창출하고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생성된 주관적 의미는 객관성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타인에게 전달하려는 의미와 타인이 받아들이는 의미가 정확히 일치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관계 안에서 어느 정도 의미가 일치한다는 무언의 합의가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이 과정에서 절대적인 객관성 추구는 독단적이다. 의미는 세상이라는 객관과 인간이라는 주관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탐구』에서 이 점을 강조한다. 나는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과거 주장을 뒤엎는 그의 모습에서 존경심이 솟구쳤다. 그리고 헤르토흐의 『시간의 기원』을 읽은 후, 나는 호킹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존경심을 느꼈다.
호킹 또한 비트겐슈타인처럼 과거의 자신을 전복한다. '전복'이라고 하니 마치 이들 스스로 과거의 성과를 부정한 것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전복'은 과거 성과의 부정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간 가졌던 사고와 접근법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의 전환은 과거를 토대로 이루어지며, 그간 이룩한 성과가 없었다면 애초 달성이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이 있어야 샛길로 빠질 때 원래 경로로 돌아올 수 있다. 이들은 더욱 전진하기 위해 관점을 바꿨을 뿐, 그동안 걸어온 길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전복'은 '과거의 부정'이 아닌 '미래로의 도약'이다.
'미래로의 도약.' 불세출의 천재가 미래로 나아가는 모습을 볼 때면 온몸에 전율이 돋는다. 호킹을 향한 내 오해는 전율과 함께 막을 내렸다. 과거 호킹의 객관적 과학관은 인간과 과학을 분리했다. 그리고 이런 과학관이 물리학 전반을 지배했다. 그 결과 우리 인간은 세상의 일부라는 감각을 상실하고 말았다. 우리 자신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감각하거나 인식할 수 없는데, 세상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바람에 세상과 일치된 느낌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소속감의 상실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결국 우리의 객관성 숭배는 인간의 주관적 감각을 등한시했고, 더 나아가 서로의 관계를 옅어지게 했다. 한국 전반에 퍼진 성과중심주의, 물질만능주의, 결과 집착, 인문계열 기피 현상, 반인륜적 이기주의 등은 모두 객관성 숭배가 낳은 부산물이다.
스티븐 호킹(우)과 그의 제자 토마스 헤르토흐(좌)
호킹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과학에서 관측자, 즉 인간의 지위를 회복시키고자 했다. 물론 이는 내 나름의 시적 표현이다. 왜냐하면 양자역학에서 관측자는 인간으로 한정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심지어 생물로 한정된다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인간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측면에서, 관측자는 결국 인간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모순이 발생한다. 우리가 인간이기에 발생하는 모순은 해소 대상이 아니다. 그저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하는 대상이다. 호킹은 객관의 영역 안에 관측하는 자신을 포함함으로써, 인간의 필연적 모순을 인정하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한다. 이제 '인간'이 과학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책의 제목은 『시간의 기원』이지만, 흥미롭게도 호킹과 헤르토흐는 "우리 인간은 시간의 기원을 알 수 없다"라고 선포한다. 과학적 객관성에만 치중했을 때는 시간의 기원을 알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인간적 주관성에 마음을 기울이자 인간이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미지의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모든 것에 정답이 있을 것이란 '착각을 희망'한다. 하지만 숫자의 끝을 상상해 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아마 먹먹한 감정과 더불어 왠지 모를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를 것이다. 그렇다고 숫자의 끝을 연구하면 정답을 찾을 수 있을까? 어불성설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인간의 필연적 무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용'. 이것이 우리 자신의 모순과 맞닥뜨렸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용감한 행동이다.
3. 우주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태어난다
불현듯 어떤 질문 하나가 뇌리를 스칠 때가 있다. '인간이 먼저일까, 우주가 먼저일까?' 물론 객관적으로 접근한다면 우주가 먼저이다. 우주는 인간존재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주를 인식하는 내가 없다면, 과연 우주가 존재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주가 인간 존재의 충분조건이지 않을까? 이런 질문이 내 머릿속을 파고들 때면, 하룻밤을 꼬박 지새워 사색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지난한 고민이 무색하게 매번 어떤 답도 도출할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무의식중에 내가 인간과 우주를 대립 구도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마치 입자와 파동을 대립 구도로 본 고전물리학의 시선처럼, 분리될 수 없는 두 개념을 대립 구도로 바라본 것이다. 이는 인간의 언어와 사고 체계가 세상을 이분법으로 구분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분법은 우리의 자의적 구분일 뿐, 실제 객관적 진리를 내포하지 않는다. 현시대에 알맞은 예를 들자면, 남성과 여성, 이과와 문과, 이성과 감성 등등이 우리의 자의적 구분의 피해자이다. 사실 이들은 상호 보완하여 통합되는 대상이지만, 이분법의 함정에 벗어나지 못한 우리는각각을 대립 관계로 본다.
즉, '인간이 먼저일까, 우주가 먼저일까?'라는 질문에 꼭 정답을 낼 필요는 없다. 인간과 우주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자,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필요충분조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곧 우주이자, 우주가 곧 인간이다. 너무 비약적으로 들리는가? 나 자신도 이런 접근이 너무 비약적이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 휩싸이곤 한다. 진리 탐구의 포기처럼 들리는가? 나 자신도 이런 접근이 패배주의적 관점이 아닐까 하는 우려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느닷없이 찾아오는 이런 걱정과 우려에도, 내 관점은 한 가지 확고한 명제를 낳는다. 그것은 '우리 개개인의 존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더 가치로 충만하다'이다.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품고 있다
객관적 시야로 우주를 탐구했을 때, 나는 인간의 가치를 보잘것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인간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기계 속에 우연히 끼어든 불순물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살면서 지나쳤던 인연 하나하나가 나름의 우주를 품는다고 생각하니, 그들의 가치가 한없이 격상하기 시작했다. 나는 손이 닿지 않는 저 밖의 객관적이고 거시적인 우주에 집중하느라, 실제 손이 닿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우주를 무심코 지나치고 말았다. 결국 나도 인간이다. 객관과 주관의 관계가 상보적이라 할지라도,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시야는 인간에게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우리에겐 객관성의 우주보다 주관성의 우주가 더욱 소중한 가치를 지닐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객관성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는 편이다. 다만 요즘 시대는 객관성의 폭정 하에 있고, 이런 폭정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인간을 중심에 둔 주관성이기 때문이다. 객관과 주관 사이의 절묘한 조화를 찾기 위해, 현시대에 만연한 객관성이라는 우상의 숭배를 멈출 필요가 있다. 세상을 물질과 결과로만 보기보다는, 관계와 과정으로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굳이 모든 것에 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 세상엔 인간이라면 도무지 답을 알 수 없는 것투성이다. 그저 우리는 정답 찾기를 멈추고 한 발씩 걸어가는 과정을 즐기면 된다. 이때야 비로소 인간은 세상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나는 말하고 싶다. "답을 알 수 없는 것은 내려놓으라. 대신 나 자신과 주변 사람에게 집중하라. 그들의 주관적 우주를 탐구하고 그 순간을 즐겨라." 가치는 저기 밖 어딘가 숨어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다. 가치는 고개만 들면 어디에나 보일 정도로 차고 넘친다. 다만 현대인은 과거에 머무느라 또는 미래를 사느라, 현재의 자신과 주변 사람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잊고 있을 뿐이다. '우주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태어난다.' 이것이 비록 논리적 결함을 갖는 명제일지라도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런 마음가짐이 우리와 세상, 그리고 당신과 나를 다시 연결시켜 준다는 사실이다.그 연결의 결과가 무엇인지는상관할 바 아니다. 그 연결을 즐기는 것, 실로 그것이면 충분하다.
* 기억에 남는 글귀
p127 모든 물체는 부피가 커지면 밀도가 줄어들지만, 우주 공간은 그렇지 않다. 공간이 아무리 크게 팽창해도 물리적 특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즉, '공간이 팽창한다'는 것은 동일한 특성을 가진 공간이 그만큼 많아진다는 뜻이다. 시공간을 채운 암흑 에너지는 정상적인 물질이나 복사와 달리 부피가 커져도 희석되지 않기 때문에, 팽창하는 공간의 미래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될 수도 있다.
p302 현대과학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 사이에 커다란 균열을 일으켜서, 우리가 세상의 일부라는 소속감을 약하게 만들었다.
p326 관측이란 역사가 갈라지는 분기점에서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를 현실로 구현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항상 모종의 상호작용이 개입되어 있지만 인간이 수행하는 관측에 국한되지 않으며, 현실 세계에 구현된 결과는 생명체와 무관할 수도 있다.
p359 호킹은 <<시간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누군가가 만물의 이론을 발견한다 해도, 그것은 방정식과 법칙의 집합일 뿐이다." 방정식에 생명을 불어넣는 원칙은 무엇인가? 하향식 철학으로 전환한 호킹의 대답은 "관찰자"였다. 우주가 우리를 창조했듯이, 우리도 우주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p401 홀로그램 이중성은 물리적 실체와 그들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법칙이 "기본적인 구성 요소"와 "그들이 얽히는 방식"의 합류점에서 탄생한다는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즉, 환원에서 창발로 갔다가 다시 환원으로 돌아오는 상호의존적 순환고리가 홀로그램을 통해 탄생한다는 것이다.
P424 양자이론을 장착한 현대과학은 인문학이 옛날부터 알고 있었지만 결코 증명할 수 없었던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과학의 시대를 맞이하여 인문학자들이 인간의 위상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지나친 참견이 아니라, 그들의 본분이라는 것이다.
P433 하향식 철학의 의하면 우주는 법칙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기계가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자기조직적 실체이며, 그 안에서 온갖 패턴이 모습을 드러낸다(즉, '창발'한다). 이들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을 우리는 '물리법칙'이라 부르고 있다. 하향식 우주론에서는 법칙이 우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법칙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존재의 근원을 묻는 질문에 답이 존재한다면, 그 답은 바깥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