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선 Jan 04. 2024

민주

지하 4층 영화관 옆 데스크. 영화관이 아니라 주차장이 있어야 할 것 같은 곳에서 민주를 처음 만났다. 깔끔하게 정리된 아치형 눈썹과 바짝 올린 속눈썹, 약간 올라간 야무진 눈매에 시선이 갔다. 나는 영화관 직원이었고, 민주는 티켓박스 아르바이트생이었다. 티켓박스와 영화관이 통합되면서 민주와 함께 일하게 됐다. 나는 얼결에 티켓 업무를 배워야 했는데, 인수인계에 협조적이지 않은 매니저님 몰래 민주에게 티켓 업무를 배웠다.


데스크는 칸막이가 없는 구조다. 열린 공간이라 진상 관객에게 무방비하게 노출되고, 동료의 기분이 쉽게 전염된다. 동료의 옅은 한숨 소리에 눈치 보이고, 창고 문이 어쩌다 크게 닫히면 '화났나?' 곁눈으로 안색을 살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체력 소모가 있었다. 내가 눈썹을 구기고 집중이 필요한 일을 할 때 관객이 오면 깜짝 놀라는 걸 보고 민주는 내게 "자리 비우셔도 괜찮아요." 말하고는 관객 응대를 했다. 민주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마음으로 일해서 같이 일할 때 데거나 어는 일이 없었다. 민주랑 일할 때 제일 마음 편했다. 회사에서 마음 편했던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미지근한 민주와 친해지고 싶어서 같이 밥 먹자고 했지만, 같이 밥 먹은 적은 없다. 1년에 3번 영화제를 준비할 때바빠서 다 같이 김밥으로 점심을 때울 때도 민주는 은박지에 돌돌 싼 김밥 한 줄을 챙겨 "쉬고 올게요."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타났다. "저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친구들도 1년에 한 번 만나요. 1년에 한 번 만나는데도 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에 간다고 친구들도 서운해하더라고요." 웃으며 얘기했다. 친한 친구부터 덜 친한 친구까지 줄을 세운 뒤 좋아하는 친구 순으로 자주 보는 내게 민주의 친구 관계론은 이해되지 않았다. 1년에 한 번 보면 친구가 아니라 지인 아닌가? 민주는 여러 번 혼자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에둘러서 말하지 않았다. 


민주가 퇴사하기 일주일 전. "저 신화 신혜성처럼 생긴 얼굴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무쌍에 갸름한 얼굴. 1층 디자인팀에 신혜성 닮은 사람 찾았어요. 퇴사하는 날 연락처 줄 거예요." 했을 때 민주와 헤어짐이 아쉬운 내게 고백 계획을 말하는 민주가 미웠다. 밉다가도 조금의 주저함 없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연락처 주겠다고 말하는 민주가 신기했다. 고백 계획을 세운 다음 날부터 민주의 속눈썹은 더 바짝 올라갔다. 월요일엔 가죽 재킷, 화요일엔 원피스. 한 동료가 "오늘 소개팅 하나 봐요?" 놀리듯 물어도 민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퇴사 당일. 한껏 아쉬운 얼굴을 한 나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연락처를 줄 생각에 달뜬 표정의 민주와 인사했다. 


며칠 뒤 데스크에 얼핏 신혜성을 닮은 직원이 데스크에 왔다. "민주 누나가 전해달래요."라며 과자가 담긴 박스를 건넸다. 민주가 이 남자와 사귀는구나. 남자친구도 자주 봐야 한 달에 한 번 봐서 만나는 걸로 자주 다툰다고 했는데 신혜성을 닮은 남자친구와는 잘 만나고 있는지 궁금했다. 민주의 연락처를 알고 있었지만 연락하지 않았다. 그게 민주가 원하는 우정일 것 같았다. 연락하지 않으며 안부를 묻는 건 내게 어색한 문법이다. 민주가 나간 자리는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이 오고 갔다. 그들과 같이 점심을 먹고 회사 밖에서 술을 마셨다. 익숙한 문법으로 가까워졌다. 알 수 없는 기승전결로 어떤 관계는 남고 어떤 관계는 끝났다. 


2년 뒤 민주가 소포를 보냈다. 소포에 적힌 '배민주'라는 이름만 보고 놀라서 "왁!" 소리 질렀다. 소포 안에는 편지와 소설 <우리가 통과한 밤>이 들어있었다. 그 소설을 민주가 쓴 책인 것처럼 표지를 오래 바라봤다. 


반가운 안부의 편지를 보냅니다. 영화관을 그만둔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은데 벌써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었네요. 요즘은 부쩍 날씨도 따듯해져 계절의 전환점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카톡이나 문자로 장황하게 쓰는 재주는 없는지라 이렇게 꾹꾹 눌러 편지를 씁니다. 


가끔은 퇴근길에 문득문득 그곳에서 일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서늘했던 창고 안의 온도나, 입장이 끝나고 나면 순식간에 적막이 찾아오곤 했던 로비의 분위기.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며 깔깔대로 웃던 것들도 생각나구요. 물론, 그 때를 그 시간과 공간을, 이렇게 아련하고 예쁘게 추억할 수 있는 건 제가 그곳을 뒤로하고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겠죠. 계속해서 그곳에 있는 선선에게는 벅차고 고단한 공간일 수도 있을텐데요. 


사람과 살 부비며 사는 것에는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 자주 만나자는 말은 못하겠지만, 우리 서로의 생사 여부가 궁금하거나 유난히 고단했던 어느 하루 끝에 한번씩 반갑게 웃으며 만나기로 해요. 좋은 걸 늘 옆에 끼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작년 읽었던 책 중 인상적이었던 한 권을 함께 보냅니다. 혹 이미 본 책이라면 영화관 한켠에 있는 만화코너에 기증해주세요. 


나는 손을 잡고 싶었고, 민주는 바라보고 싶었나 보다. 손을 잡으려면 옆에 있어야 하고, 바라보려면 거리가 필요하니까. 민주가 보내준 책을 천천히 읽었다. 한번씩 민주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연락하지 않았다. 민주가 편지를 보내온지 1년 뒤 내가 퇴사하면서 민주가 보고 오열했던 영화 <프란츠> 포스터와 편지를 보냈다. 민주의 방식대로.  

keyword
작가의 이전글 글 반죽하고 수제비 뜨던 날들 안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