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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쓰 Oct 16. 2020

백수가 과로사한다며

왜 그런가 했더니

1.

정말 신기하게 백수가 제일 바쁘다.

난 대체 왜 이렇게 바쁜 것일까.

오늘 드디어 한숨 돌려보나 했더니,

개뿔.


2.

한숨 돌릴 줄 알았던 이유는 로스쿨 입시시즌이 거의 끝나가기 때문.

한 3주 정도, 아이들 로스쿨 자소서 첨삭 알바? 과외? 를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 알바가 얼마만큼의 파괴력을 지닐지 생각도 안해보고 무작정 뛰어들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을 온 몸으로 실감하면서.


3.

아니 그런데, 이거 생각보다 너무 책임감을 가져야 되는 일이잖아.

당황스러웠다.

나 때문에 애들이 로스쿨 갈 수도 못 갈수도 있는거야?

물론 못 간다고 내 탓은 아니겠지...맹세컨대 내가 글을 더 망친 아이는 없다...고 믿고 싶다...


그렇지만 아무리 저렇게 자기위안을 해도,

생각보다 남의 운명을 더 많이 나눠 지게 되었다는 깨달음이 하루 하루 나를 짓눌러왔다.

3주 정도 하니 그 중압감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가 되었고

아 이 짓 다신 못하겠고, 그나마 지금 담그고 있는 발도 빨리 빼야겠단 생각을 굳히니,

올해 자소서 시즌은 어느새 끝나있었다.


4.

돈 없어서 사람들도 못 만나고 위축되어 있던 요즘,

글로 만나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경찰하다 로스쿨 가고 싶은 아이,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아동인권변호사가 되기로 한 아이 -

아이들의 목소리와 말투만큼이나 사연은 다양했고

나는 또 - 역시나 마음을 너무 많이 줘버렸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아이들에게.

다들 좋은 결과 있었으면.


5.

그 와중에 어떻게든 변호사는 되어보겠다고,

수습과제를 꾸역꾸역 해내고는 있었는데. 대표님 마음에는 전혀 차지 않았고.

또 한소리 들었다. 인생 쉽지 않아요.


6.

더 충격적인 사실은,

글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이 글을 쓰는데 4일 이상이 걸렸다는 것이다.

글을 끝낼 정신도 없어서 오늘 간신히 대-충 마무리한다. 참나원.


7.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가도 그런 여유를 갖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10분의 1까지도 숫제 초조와 번잡에 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 " - 피천득, [인연] 중 <수필>


8.

피천득의 사상은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문장은 좋아하고.

[인연]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으며 그의 안티가 되는 바람에, 책 넘기기 너무 힘들었지만 저 부분은 좋았다.

역시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지, 사람이.

그렇다고 내 글이 수필씩이나 된다는 건 아니다. 나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다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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