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도리어 부담이 될 때
어쩌다보니 이직한 회사에서 광고, 마케팅이 아닌 전혀 다른 업무를 하고 있다. 쉽게 말해 프로덕트부터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데, 커뮤니티 회사에 다니고 있는지라 커뮤니티를 기획하는 게 요즘 나의 주된 일로 자리잡았다. 사실 기획이라고 해 봐야 아주 좁은 영역에서의 기획일 뿐이다. 교보문고같은 서점, 콜로소같은 클래스 사이트, 넷플연가같은 경쟁사 동향을 보며 요즘 어떤 주제가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는지, 지식인들의 트렌드는 무엇인지 가볍게 살피고, 이를 이끌어가는 주축이 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발라낸 다음, 그들이 이끌어갈 수 있을 만한 주제를 염두에 두는 수준으로 하는 기획.
사람들이 모이는 '꺼리'는 무엇일지를 고민하는 이 일은, 생각보다 부담 없다. 트렌드를 숨 쉬듯이 쫓아가는 사람으로서 보다 쉽게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물론 권장해야 할 트렌드, 그러면 안되는 트렌드가 있기 마련이지만, 어쨌거나 몇날 며칠 밤을 새서 커뮤니케이션 방향성을 도출하고 캠페인 아이디어를 짜내던 시절에 비하면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손가락을 가르키는 분야는 뭐야?"를 알아맞히는 이 일은 너무나 쉽게 느껴지곤 하는 것이다.
이 일을 하며 얻은 러닝 포인트는 두가지인데, 첫째는 "정말 좋은 브랜드는 막대한 예산의 마케팅이나 이벤트가 아닌 정말 좋은 프로덕트에서 생겨난다는 점"이고 둘째는 "커뮤니티에선 정말 '사람이 전부다'라는 점"이다. 사람도 브랜드가 될 수 있다고 야심차게 깨달았던 과거의 내가 허무해질 만큼, 진짜 사람이 브랜드가 되는 세상인 듯 하다. 특히 커뮤니티에서는 구심점이 되는 사람 1명의 보이스가 그 어느 공급자 측면의 메시지보다 유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좋아요 수, 팔로워 수 등 요즘엔 누군가의 영향력과 매력도, 인기도를 측정하는 지표들이 많아졌지만, 이 사람이 단지 '스쳐가는 컨텐츠 속 주인공 1명'으로 여겨지는지 혹은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 드리머 1명'으로 여겨지는지는 강연, 북토크 등 오프라인에서의 만남으로 치환했을 때 명확히 드러난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금 내 일에 중요한 '기획'이란 그 1명을 찾아내고, 그에게 알맞는 매력있는 아젠다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판을 짜는 것 뿐이다.
처음엔 그냥 감이 오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이런 것도 좋지 않을까?"라며 따발총 쏘듯이 기획했다. 레퍼런스도 없는 분야고, 성공 방정식도 없는 듯 하여 우선 마음 내키는 대로 시작해 본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서서히 장기적인 방향성이 잡힌다. "이 섹터의 이러한 아젠다는 스테디셀러구나, 적어도 연간 12명의 구심점은 필요하겠다.", "이 아젠다는 진짜 트렌디해서 잘 팔릴 것 같았는데 사람들이 생각보다 선뜻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구나, 답이 이미 정해져 있거나 너무 두루뭉술한가보다.", "이게 바로 요즘 트렌드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온라인에서 이미 많이 소진된 아젠다는 오프라인에서까진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나보다." 등 말이다.
이렇게 직접 헛발질 해가며 알게 된 노하우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다행인 건, 내가 이 과정을 그간 스트레스 없이 겪었다는 점이다. 참 신기하다. 나는 원래 결과물에 있어서 또렷한 답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 미치겠는 사람인데, 그래서 더 레퍼런스를 뒤져보고 여러 의견을 구하는 사람인데. 이 일에 있어선 그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니.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가 정말 잘 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일이 아니어서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던 게 아닌가 한다. "일단 해보고, 아님 말고"의 마인드가 필요한 순간들이 정말 많았는데, 이렇게 정신건강에 좋은 건 줄 알았으면 미리 좀 탑재할 걸 그랬다.
앞으로도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도리어 부담이 될 때, 그래서 그게 표정과 피부와 심장 박동으로 느껴질 때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일단 해보고, 아님 말고"가 주는 긍정의 힘을 떠올려 보련다. 덜 좋아하는 일에서부터 점점 연습을 쌓아나가면, 가장 좋아하는 일에 있어서도 필요할 때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는 스킬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사실, 그게 진짜 프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