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받으며 일한다는 건
일주일의 유급 휴가 후, 새로운 팀에 발령받게 되었다. 다소 젊어보이는 팀장님은 내게 궁금한 게 많아보였다.
“왜 팀 이동하게 된 거에요?”
“…안 맞아서요.”
“그래, 딱 보기에도 그 팀이랑 안 맞아보여요.”
네,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어떤 말을 들어도 별로 타격감이 없을 때였다. 간단한 인사 겸 면담이 끝나고, 곧이어 새 팀장님은 새 팀원님들에게 날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신입사원 소브메입니다.”
“6개월정도 지났으면 신입사원은 아니지.”
새 팀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는 ‘바빠 죽겠으니 말 걸지 마시오’였다. 나는 머쓱하게 자리에 앉았다. 나, 이곳에서는 얼마나 일하게 될까?
‘이 팀하고도 안 맞으면 어떡하지’ 란 첫인상이 무색하게도, 생각보다 나는 새로운 팀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내일까지 이 브랜드한테 선제안 할 CSR 방향성 생각해와.”
“내일까지요?”
하루만에 기획서 써오라 하는 게 여기선 당연한 건가?
“너 실력 보려고 하는거니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와.”
아, 지금 내 싹수와 실력을 시험하고 계시는구나. 대놓고 말해주니 오히려 감사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기획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코로나 CSR 액션 제안해야하는 거 맞죠?”
“응 예산은 생각하지 말고.”
패션 브랜드가 코로나 시국에 할 수 있는 공익적인 마케팅 액션이 무엇이 있을까. 머릿 속은 망망대해 같았으나 일단 상황 분석부터 하자는 마음으로 코로나로 인해 어떤 라이프스타일의 변화가 생겼는지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후 브랜드의 철학, 히스토리, 최근 행보까지 쭉 서치하다보니 어느새 깜깜한 밤이 되었다. 다른 팀원들은 모두 퇴근하고 없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인데. 소리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나름 2회차 고난이라고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PPT 장표를 하나 하나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작업하는 동안, 어느덧 시계는 10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아직 안갔네?”
슬슬 집중력이 떨어지던 찰나,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회식을 하고 온 듯한 팀원님들은 빨개진 얼굴로 내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걱정돼서 와봤는데, 잘 하고 있는 것 같으니 간다.”
그리고 두 분 다 정말 슝 하고 다시 가버리셨다. 하지만 잠깐 건네받은 이 한 잔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인해 내 야근이 걱정받고 있구나, 내가 잘 하는지 궁금해 하시는구나가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그 커피 한 잔만큼의 호의에 힘이 났다.
다음날 아침, 나는 새벽까지 준비한 기획서를 발표했다.
“많이 노력한 게 느껴지네. 잘했어.”
“이거 그대로 상무님한테 발표하고 와.”
나의 자신감을 되찾아주려고 그랬던 걸까, 돌이켜보면 그다지 괜찮아보이는 기획서는 아니었을텐데. 두 분은 내 기획에서 부족함보다는 좋은 점을 끄집어내 칭찬해주셨다. 그것은 정직원으로 입사 후 처음으로 아이디어가 존중받는 경험이었다. 그 때 깨달았다. 나에게 있어서 존중받으며 일한다는 게 너무나 중요한 일이구나.
이후에도 새 팀원님들은 업무를 할 때 부족한 기획에 있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디벨롭되어야 더 좋은 기획이 되는지 가이드를 주셨고, 팀에 논의가 필요할 때는 햇병아리인 나에게도 의견을 물어봐 주셨다. 또 처음 해보는 실수에 대해 이해를 받을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혼날 때도 많았지만 감싸주실 때가 더 많았다. 그 속에서 가끔 받는 칭찬은 참으로 감칠맛 나는 것이었다.
2년 여 간의 시간동안, 많은 경쟁PT를 함께하며 고생을 나눈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 속에서 주니어가 체계적으로 배운다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비록 필연적으로 야근이 뒤따르긴 했어도, 내겐 팀원님들 한 분 한 분이 모두 사수님이었다.
일하는 맛이 난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