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내가 여기에만 있을 거라고 생각해? - 미드나잇:앤틀러스 ‘비지터’
안녕하세요, 선생님. 제 첫 편지를 받게 되셨네요. 화려한 미사여구를 사용할 줄도 모르고, 동어가 반복될 수도 있지만 무언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니 예쁘게 봐주시면 좋겠어요. 모쪼록 말입니다.
첫 편지의 주제를 놓고 한참을 고민했어요. 적당히 평범해 보이지만, 애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 글이 잘 나올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이미 지나가버렸지만, 사랑해 마지않았던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건 뭔가 기만 같잖아요. 혹시나 선생님께서 제 편지를 받고 그 공연이나 캐릭터가 보고 싶어 지셨는데, 이제 더는 세상에 남지 않았다면 말이에요. 그래서 편지를 쓰는 이 시점부터 적어도 2주는 더 공연하는 것들 중에서 고르기로 했어요.
저는 2021년부터 뮤지컬을 봐 왔기 때문에 사실 이번 미드나잇 앤틀러스 시즌 이전의 앤틀러스는 잘 몰라요. TOM에서 했던 미드나잇 액터뮤지션, 예그린 씨어터에서 했던 미드나잇 액터뮤지션만 열심히 보다가 이번 공연으로 앤틀러스 공연을 보게 됐어요. 첫 관람 때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비지터라는 인물에게 꽤 큰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도 이 극을 예매하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건 비지터 배우니까요.
비지터는 아마도, visitor를 그대로 읽은 것 같아요. 극에서는 부부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맨과 우먼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아마 등장인물은 극 중 대사처럼 ‘어디에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는 악한 사회에서는 누구나 맨도, 우먼도 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이 극을 보는 내내 한나 아렌트를 떠올렸습니다. 그녀는 유대인을 학살했던 전범의 재판 기록에 대해 기록하며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에 대한 성찰을 했어요. 우리는 그녀의 성찰을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접하죠. 저는 그 책을 대학생 시절 과제로 읽었던 적이 있어요. 어려운 내용은 아니지만, 양이 방대하기도 해서 관련된 특강을 듣기도 했어요. 기억 속에 묻어뒀던 그녀가 이 극을 봤던 날 떠올랐어요.
누군가는 비지터를 신이나 천사로 해석하지만, 저는 비지터는 개인의 양심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누구나 악한 세상에서 무비판적인 태도로 악한 행동을 할 수 있지만, 개인의 마음 안에 있는 양심은 절대 그렇게 쉽게 물들지 않으니까요. 이 극에서 비지터는 언제나 웃는 얼굴을 합니다. 우먼이 설령 자신의 몸에 위해를 가하더라도 말이에요. 우먼에 의해 두 번이나 위협을 받았음에도 비지터는 진심으로 화내지 않아요. 오히려 우먼을 향해서 비아냥거리죠. 그런 비지터가 화를 내는 순간은 딱 한 번이에요. 맨을 향해 불쌍한 친구는 아무 죄도 없이 고통받고 죽어갔다며 일갈을 날리는 장면이었어요. 맨이 고발했던, 그래서 총살당한 그의 오랜 친구 변호사의 죽음이 무고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어쨌든, 비지터는 극 내내 맨과 우먼을 울리고 그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만 실은 억울한 죽음에 대해 화내는 존재기도 해요.
저는 비지터의 많은 대사 중 이 말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왜 내가 여기에만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인데요, 배우마다 디테일이 조금씩 달라 어미가 달라요. 저 대사가 가장 좋은 이유는 이 극을 보고 있는 우리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기 때문이에요.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은 모두에게 찾아들 수 있고, 그것이 결국 우리에게 악한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되짚게 해요. 한나 아렌트는 악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분별력을 갖고 악을 대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비지터가 하고자 하는 말도 결국 그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해요.
이 극에서는 1937년의 러시아라고 하는 굉장히 혼란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쩌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렇게 와닿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하고,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나의 자유를 보장받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믿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6년 전, 헌법 수호의 의지가 없는 대통령을 쫓아냈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핍박을 받았죠. 그 이후에는 그런 일이 없었나요? 글쎄요. 저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 사회는 언제든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어요. 적어도 우리가 대의 민주제를 채택한 채로 살고 있는 한은 말이에요. 거기다 우리는 독재의 역사로 얼룩진 현대사를 갖고 있어요. 하지만 모두가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 민주제가 과연 최상의 정치 체제일까요? 당장 실현할 수 없는 이상이 언제나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럼 이 사회가 건강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뭘까요. 결국 개인이에요.
사회에 분별력 있는 어른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는 맨도, 우먼도 되지 않고 비지터를 만나지 않아도 될 거예요. 하지만 뭐가 악한 건지, 악한 것을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면 우리는 ‘누구나 악마죠, 때로는’에 어울리는 사회에 살게 될 거예요.
맨은 우먼에게 비지터의 정체를 추론하기를, 악마라고 해요. 그런 맨을 향해 비지터는 웃으면서 대답하죠.
‘혹시 모르죠, 만약 악마가 나타나다면 지금이야말로 딱 좋은 때와 장소가 아닌가? 뭐 뿔이나 꼬리가 달려있을 것 같아요? 불꽃도 막 이글거리고? 아니. 오히려 길을 걷다 만나는 보통 사람 같을 걸요. 따지고 보면, 당신이랑 다른 게 하나도 없는.’
조금 섬뜩하지 않나요? 나와 다른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 악마라면, 사실 나도 악마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니까요. 저는 성악설보다는 성선설을, 성선설보다는 성무선악설을 믿는 편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도화지 같아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을 믿어요.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악하게 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도요. 조금 더해서, 우리는 사람의 탈을 쓰고 악마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같이 하게 했던 캐릭터가 바로 비지터였어요.
이 극을 사랑하는 제 친구는 비지터가 무서워야 한다고 생각한대요. 저는 무서울 필요까진 없지만, 거부감을 느끼게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원래 ‘양심적으로 산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니까요. 비지터를 멋있게 느끼는 건 어디까지나 이게 공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대부분은 신나는 템포를 갖고 진행되는 극이기도 하고요. 그 템포를 갖고 러닝타임 내내 개인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양심의 문을 두드리는 캐릭터가 비지터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선생님, 착하게 살기에는 너무 어려운 세상이잖아요. 악하게 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더 좋은 사회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