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 Mar 26. 2024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어른이 된다

출처: 인터파크 티켓


2021년, 지인의 추천으로 대학로에 가서 뮤지컬 한 편을 관람한 적이 있다. 당장 표를 양도받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2024년인 지금까지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좋아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3개월 간격으로 가장 사랑할 때 마지막 공연을 해 버리는 이 장르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는 선조들의 말에는 진짜 힘이라도 있었는지, 지금까지 뮤지컬 관람하는 데에 쓴 돈이면 중고로 SUV를 한 대 살 수 있을 수준으로 어마무시하게 돈을 썼다. 모든 소비가 성공한 것도 아니고, 실패의 역사가 더 많지만 그래도 그 찰나에 찾아오는 전율을 잊지 못한 나는 아직도 뮤지컬을 보러 다니고 있다.


2021년의 나는 추천받은 뮤지컬과 연극은 다 보고 다니는 다작러였는데, 그때 봤던 뮤지컬 한 편은 단 한 번의 관람만으로 손에 꼽히게 사랑하는 뮤지컬이 되었고, 지금도 그 순위는 유효하다. 오늘은 단 한 번의 관람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다윈 영의 악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이 뮤지컬은 故 박지리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 이희준 작가가 각색하여 만들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뮤지컬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무대 위로 가장 잘 옮긴 뮤지컬이라고 생각한다. 지나가는 말로 들었지만, 출판사에서도 이 소설에 마음을 많이 쏟아 뮤지컬로 만들어지던 무렵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한다. 공연을 관람해 보면 안다. 왜 그렇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안타깝게도, 서울예술단에서 올리는 이 공연은 한 번 올라올 때 3달은 공연하는 다른 극과는 달리 3주 정도만 공연하고 내려간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고, 2021년에 관람해 보았을 때 그 이유를 나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공정하다는 착각’을 필독서로 지정해서 모두에게 읽혀야 한다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사람에게는 이만한 인생작품이 없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데, 공연이 오래 하지 않으니까 아쉽긴 하다.

이 뮤지컬은 생각할 거리가 많다. 표면적으로는 ‘악은 대물림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실제로 주요 사건도 ‘제이 헌터 살해’라고 하는 사건에서 파생되어 이어지고 있지만 조금만 더 들어가 보면 ‘레오’의 입을 빌려 사회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작품에서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 설계에 끼어드는 것은 재앙이다’라는 대사가 있다. 여기에 대해 ‘그럼 그 자격은 누가 정하는 거냐’라는 물음이 이어지는데, 아예 다른 세계관을 공유하고 살아가고 있는 21세기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도 한 번은 고려해 봐야 할 만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업으로 6년 정도를 살아왔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고등학교에서 보내거나 고등학생을 상대했다 보니, 어디에 있건 아이들에게 늘 ‘좋은 학교’를 강조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입시 시스템은 기형적으로 망가져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 기형적인 시스템 안에서 아이들이 ‘좋은 학교’로 갈 수 있는 최적의 길을 찾아주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거다. 


기능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좋은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고, 그 기술을 바탕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다고. 그런데 정말 우리 사회가 좋은 학교에 진학하면 좋은 기술을 습득할 수 있나? 반드시 좋은 학교를 졸업한 사람만이 좋은 기술을 습득한 걸까? 사실 우리나라에서의 대학 졸업장은 취업을 위한 하나의 관문이 되었을 뿐인데.


이른바 ‘갓생’을 살아야만 한다는 압박도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극한의 효율충이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지만, 모두가 나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즉흥적인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나보다 더 자주 행복을 느낀다. 불행하지 않기 위해 힘쓰는 것과 자주 행복을 느끼기 위해 살아가는 것, 사실 어른들이 가르쳐줘야 하는 건 이런 건데 나조차도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는 할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하지만 내 수업을 듣는 아이들의 목적성과는 거리가 멀기에 결국 딜레마에 빠진다. 


하지만 한 번은 생각해 보면 좋겠다. 나는 아이들의 문해력이 점점 나빠진다는 기사를 볼 때 마다 그건 어른이 초래한 결과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의대에 진학하는 게 인생의 유일한 목표라고 가르치면서 지방으로 이사까지도 감행하는 것이 ‘좋은 부모의 모습’이라고 여겨지고, 책을 읽는 즐거움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독서를 도구적으로만 활용하려고 하면서도 아이가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모습……. 이 모든 것들이 종합적으로 점점 문해력이 나빠지고, 타인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매거진의 이전글 사상검증구역, '빈곤'은 개인의 책임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