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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 Apr 02. 2024

내 삶의 정치를 미워하지 않기

힘들 때마다 꺼내보는 기억이 있다


나의 대학 전공은 역사교육이었다. 지금도 역사를 가르치면서 먹고 사는 중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운이 꽤 좋은 편이라고 하겠다. 역사를 전공한 사람 중에 자기 전공 살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하니, 학원이든 학교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배운 내용을 충실히 써먹을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운이 좋은 축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와 학원에서 가르치는 역사는 조금 다르다. 물론 그 내용적인 면에서의 차이는 거의 없지만, 접근법이 다르다. 전자는 아이들의 생각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또 그러면서도 줄을 세우기 위한 문제를 잘 내는 것이 중요한 곳이다. 시험 문제를 내는 시즌에는 예민하기 그지 없어지고, 내 시험이 문제 없이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아이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래서 내게 시험 당일은 꼭 해방되는 기분을 주는 날이기도 했다.


학원은 좀 다르다. 학원은 기본적으로 역사라는 과목에 도구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중학교는 고등학교 입시가 필요한 아이들의 성적 관리용으로, 고등학교는 내신 등급용으로. 근무하던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던 동료 선생님들과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연을 이어오고 있는데, 우리는 ‘좋은 점수를 받게 하는 것보다 좋은 문제를 내는 게 더 어렵다’는 말에 과목을 불문하고 늘 동의했었다. 좋은 점수를 받게 하는 건 말 그대로 공부를 하게만 하면 되는 일이니, 좀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할 수는 있으니까. 하지만 좋은 문제를 만드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고, 오류 없는 시험은 30년 동안 문제를 만든 선생님도 어려워하는 숙제다.


어쨌든, 이제는 역사를 도구적으로 접근하는 것에 현타 느낄 시기가 지나버린 지금도 나는 여전히 역사를 좋아하고, 역사라는 과목을 공부하면서 꽤 얻을 게 많다고 생각하는 낙관주의자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지나간 일 중에서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은 마음 속 저장고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본다. 꺼내보는 기억은 거의 비슷하다. 힘들 땐 이거, 우울할 땐 저거, 화가 날 때는 요거.


그중에서도 요즘 들어 자주 꺼내보는 기억은 2015년과 2016년의 기억이다.


2015년 당시 박근혜 정부에서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라는 카드를 꺼냈었다. 아, 대학교 입학하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진짜 꾸준하게 시위에 나갔었다. 역사 전공한다고 했을 때 주변의 친척 어른들이 농담처럼 ‘너 시위 나가는 거 아니냐?’ 라고 하셨을 때 웃어넘겼던 건 정말 내가 그럴 것 같았기 때문이었지만, 그렇다고 정말 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다니. 이런 거지 같은! 매일 그렇게 욕을 해댔었다.


나는 2014년부터 개인 과외나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었는데, 사실 16년 이전에는 민주화 운동을 가르치면서도 별로 와닿는 게 없었다. 시위를 제대로 해 본 경험도 없었고, 사실 ‘그럼에도 시위에 참여하는 마음’ 같은 건 몰랐으니까. 그리고 가끔은 이해도 잘 안 됐다. 예전에 역사를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께서는 4.19 혁명이 있었기 때문에 6월 민주항쟁도 있었던 거라고 하셨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던 그 말을 2016년에 깨닫게 된 거다.


요즘도 가끔 시함뮤에서 불렀던 민중의 노래(https://youtu.be/qPftB1tfwF0?si=W9zr5qW0iGo-nnpY)가 알고리즘을 타고 자동재생이 될 때가 있다. 순수하게 열망하고 타올랐던 시절은 이미 지나가버렸지만, 그때 자주 들었던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때의 나로 잠깐은 돌아가는 것도 같다. 매일 지하철을 타고 버스 막차를 타고 집에 들어가던 대학생이 어느덧 운전대를 잡은 사회인이 되었는데, 왜 자꾸 그때 생각이 나는지.


누군가는 그때 탄핵이 너무 쉽게 됐다며, 그래서 사람들이 투표할 때 생각을 깊게 하지 않는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그래도 그때는 그렇게 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쉽게 한 탄핵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는 다 닳아버린 채로 너덜거리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때의 기억은 이렇게 내가 늘어질 때마다 그래도 미워하지 말고 한 번 더 내가 살고 있는 지역구의 정치적 현안은 뭔지,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치적 이슈에는 뭐가 있는지, 우리가 더 좋은 세상에 살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고, 민주주의도 그런 거 아닐까. 직접 그 장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어떤 정치 혐오를 야기하는 콘텐츠에 노출되더라도 절대 넘어가지 않고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정치를 외면하지 않게 되는 거라고, 총선이 다가오니까 이상하게 요즘은 이런 생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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