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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이 May 16. 2024

생의 마지막 순간 나누는 대화

한 때 나는 중환자실 간호사였다. 그것도 가장 응급하고 가장 상태가 위중한 환자를 케어하는 '응급중환자실'이라는 곳에서. 하루에도 아니, 한 듀티에도 환자들의 상태는 시시각각 변화했다. 새로운 환자들이 입실하고 그중 몇 분은 회복해서 병동으로 올라가기도, 다른 병원으로 전원을 가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응급하고 중한 환자들이 있는 곳이라는 건 갑자기 중환자실에 오게 되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길지 않은 경력이지만 일하면서 많은 환자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켰다. 점점 몸이 차가워지고 모든 반응이 사라져 가고 심장 박동이 느려지는 과정. 연명치료를 하지 않는 환자분들에게서 그런 사인들이 보이면 의사에게 알리고 보호자분들에게 연락을 했다. "환자분이 곧 돌아가실 것 같으니 중환자실로 와주세요." 평소에는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된 중환자실이지만 연락을 받고 오신 보호자분들은 면회를 시켜드렸다. 보호자분들이 오시면 커튼을 치고 상황을 설명하고 환자분과 인사를 나누라고 했다.


적막한 공기, 각종 모니터링 기계들이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음 소리, 낮인지 밤인지 모른 채 24시간 바쁘게 돌아가는 곳에서 마지막 면회를 하면서 어떤 분들은 흐느껴 울고 어떤 분들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울음을 꾹꾹 삼키며 눈물만 흘리기도 했다. 기회가 되면 나는 보호자분들에게 "청각은 가장 마지막에 사라진대요,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환자분 귀 가까이에 대고 말씀하세요."하고 말하곤 했다. 환자분의 의식이 어디쯤인지, 말하는 소리를 다 인지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귀에 담아 가시라고. 보호자분들에게는 그래도 하시고 싶은 말씀 다 하고 보내시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사진: Unsplash의 César Abner Martínez Aguilar


생의 마지막 순간 나누는 대화. 내가 지켜봤던 거의 모든 삶의 마지막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엄마, 그동안 많이 아팠지? 너무 고생 많이 했어. 이제 편히 쉬어. 사랑해"

"아빠, 제 아빠가 되어 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사랑해요."

"여보, 미안해. 당신한테 참 미안하고 고마웠어. 사랑해"


마지막 순간, 원망스러웠던 감정을 쏟아낸다거나 후회를 늘어놓는다거나 하는 분들은 없었다. 모두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한다는 메시지였다. 결국 삶의 끝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사랑이었다.  


환자분들 곁에서 많은 죽음을 경험하면서 나는 종종 나의 죽음을 그려보곤 했다. 나의 죽음의 순간은 어떨까. 삶의 끝에서 나는 무엇을 후회하게 될까. 더 열심히 일해서 대단한 뭔가가 되지 못한 것을, 그럴싸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것을, 더 많은 돈을 모아 떵떵거리며 살아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될까? 정말 그럴까. 그런 것보다는 남들이 말하는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삶을 살아내느라 정작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보지 못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을, 나를 더 사랑하고 돌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까.


나는 가끔 인생이 헷갈린다고 생각할 때, 바쁘게 몰아쳐 어딜 향해 가는지도 모르는 채 종종거리며 살아간다고 느낄 때 죽음을 떠올린다. 그러면 진짜만 남는다. 진짜로 내가 살고 싶은 삶이, 진짜로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이 또렷하게 보인다. 그리고 결국 삶의 끝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되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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