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기로운 기자생활 Jun 23. 2021

너 그러다가 죽는 거 아니야?

요즘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가아~끔 듣는 말이다. 나 아직 27살이고, 건강한데?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누구를 만나는지에 따라서 달랐지만 날 대표하는 색깔은 까칠함이었다. 아, 그렇다고 사람을 차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하튼 까칠함을 한꺼풀 벗겨내고서야 사람들을 대할 수 있었다. 단점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다. 아니, 고치고 싶지 않았다가 더욱 정확한 표현이겠다.


나만을 위한 시간에 대한 고집이 컸던 탓이었다. 고집의 기원까지 이야기하기엔 너무 지루해질 것 같아 넘어가겠다. 간단히 요약하면 교회 가기 싫어하는 남자아이였다 정도가 어울리겠다.


무엇을 하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어 했기에 내 계획이 조금 어그러진다면 여지없이 까칠하게 말이 나갔다. 남들 같으면 참을법한 불편함도 난 넘어가는 편이 아니었고,  공동체보다도 나를 우선하는 경향이 생겼다. 일에 있어서도 효율성을 추구했다. 일머리가 있는 나는 답답하게 일하는 사람과의 협업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더 고생하더라도, 홀로 일하는 편이 좋았다.  


그랬던 내가 어느 순간 달라지고 있다고 들려온다. 주변에서 "너, 좀 순해졌다"는 이야기를 많이는 아니고, 조금씩 해준다. 사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솔직한 내 속마음을 고백하면 '내가 무슨 강아지도 아닌데, 순해졌다니...'였다. 지금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좋게 말해줘도 까칠함은 완벽히 사라지지 않았나 보다. 너란 나는 진짜 쉽지 않은 놈이었다. 근데 정말로 내가 변했다고 느끼지 못해서 그랬다.


내가 직접 체감하기 시작한 시점은 작년 말이었다. 버스를 타면서 기사님한테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고, 주변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게 됐다고 해야 될까.  곰곰이 생각해봐도 이유를 모르겠더라. 코로나 시국에, 회사 막내에, 개인적인 아픔까지 몰리면서 오히려 까칠함이 배로 커져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에 순해졌다니 아리송했다.


그래서 요즘 제일 마음이 잘 맞는 친구한테 이야기를 꺼냈다.


"야, 내가 좀 성격이 변한 것 같아"


 그러고 친구, 아니 친구 새끼 대답이 웃겼다. 친구를 새끼라 칭한 이유는 뒤에서 나온다.


"너 안 달라졌으면 너랑 친구 안 했어"


이 친구를 만난 건 대외활동을 같이 하면서다. 첫인상을 유심히 보는 내 친구는 날 보자마자 '저 애랑은 밥 한번 먹을 일이 없겠구나' 싶었다더라. (이 자식아, 누가 보면 내가 악마인 줄 알겠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런 생각이 사라지면서 계속 연락을 하게 됐다고 말해줬다.


그래서 혼자서 생각해봤다. 내가 왜 변했지?


아직 정확한 답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내린 결론은 여유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시기에 난 꿈을 이뤘고, 꿈을 통해 돈을 벌고 있다. 억대 연봉을 벌지는 못해도 내가 사고픈 걸 사고, 하고픈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면 행복지수가 상당히 올라갔다. 내 생각보다 워라벨도 좋고, 능력도 점점 인정을 받는 기분이다.


탁 터놓고 말하면 미래에 대한 고민이 없어졌다. 고민이 완벽하게 사라진 건 아니다. 커리어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 결혼에 대한 부담감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고3부터 재수 시절 나를 짓누르던 입시 부담감, 군대에서 시작돼 4학년 때까지 이어져온 취직에 대한 스트레스 정도만큼은 아니다.


나를 위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 덕에 ''라는 사람 속에 여유라는 공간이 생겼다고 생각 중이다. 그래서 지금이 좋다. 앞으로도 이 공간을 잘 가꾸면서, 깊이를 키워나갈  생각이다. 사람은 변한다면 죽는다는데, 세상 어디에나 반례는 있는 법. 그 반례로 성장해볼 생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안해, 내가 엄마를 잘못 키웠나 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