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브런치에 글을 쓰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논문 쓰고 정신없던 시절 더 의지하며 이 곳에 감정의 조각들, 배운 것들과 사색의 조각들을 풀어놓았던 것 같다. 예술에 대해 사랑을 품고, 공부라는 것을 해 석사라는 종이 한 장을 받으면, 예술을 그래도 즐겁게 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무언가 밥벌이를 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주제가 일상적으로 쉬워질 것이라 생각했다.
석사 졸업과 동시에 임신을 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 어느덧 9개월이다. 예술의 트렌드를 쫓아가기는 어려워졌고, 어쩐지 그를 논한다는 것도 우습고 사치스러워진 듯한 느낌이다.
이따금 책을 꺼내 펼쳐보지만, 한시도 눈을 못 떼는 아기 때문에 온전히 집중하기란 어렵다.
공부를 방해하는 오동통하고 작은 손
'아아, 말로만 듣던 경력 단절인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믿고 버티던, 여느 때와 다른 없던 어느 날. 육퇴 후 유럽에 대한 책을 뒤적거리다 문득 강렬한 무언가를 느꼈다. 예술, 나는 그것에 대해 더 심오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졌을지도 모른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 오래된 주제인 사랑에 대해 하나의 눈을 더 갖게 되었는데 말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알았으면서도..
어렴풋이 머리로만 이해하던 또 다른 세계의 문을 열어놓고 왜 더 충만하게 느끼지 못했던가?
시대가 요구하는 커리어나 공부면에서 이 기간에 아쉬움이야 있을 것이고, 그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에 대한 힘겨운 변론으로 봐도 좋고, 누군가에게 이런 글이 여우의 신포도 맥락의 또 다른 응용사례로 비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분명 내겐 중요한 순간이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생애와 경험, 철학적인 측면에서 내게 이 기간은 중요한 시간이 될 것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진정한 인류애란 무엇인지를 깨달을 기회다. 그전까지 예술을 논할 때 내가 느끼고 고려하던 예술가들과 사랑에 대한 정의는 그야말로 간접적인 이해를 통해, 지식을 동원해가며 받아들이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은 그의 자식이나 다름없었다고? = 작품을 아꼈다'
이런 식으로 지레짐작되는 것, 내가 경험한 수준의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사랑.
고작 '아꼈다' 세 글자로만 받아들이던 나의 얕은 사랑에 대한 경험의 폭은,
오로지 한 존재로 인해 저 심해와 같이 깊이를 알 수 없어졌다.
육아도 예술에 대한 공부라는 찰나의 생각. 혹은 예술이 육아에 대한 공부였을 수도 있고. 그렇게 오색찬란하게 다양한 예술가들의 다양한 방식이 빚어내던 사랑을, 내 몸으로 온전히 빚어보는 시간.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어디까지 가능한지에 대한 공부. 비록 트렌드를 쫓지는 못해도 진리를 깨달아가는 과정이라 믿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