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같은 세상을 보고 있지만 인식하는 것은 전부다 다르다. 각자의 렌즈와 스펙트럼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이 쌓아온 업식과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법륜 스님은 말씀하셨다. 난 이 강의를 듣고 ‘제 눈에 안경’이란 속담도 생각났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에게 건넨 말도 생각났다.
나는 20대를 통틀어 대학 동문, 직장 선후배 등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했다. 그들은 나란 존재자체에 대한 열등감을 갖고 있는 소문 없는 소문을 진위 확인도 안하고 퍼뜨리고 괴롭힘에 가담했다. 내가 억울함을 토로하고 신고를 하고 도움을 요청하자 모두 묵살하고 또다시 2차 가해를 해오고 증오를 보여주며 오히려 나의 실력과 나의 모든 인품과 내가 쌓아온 모든 것들을 짓밟았다. 그들에게서 나는 전쟁 중 광기에 빠진 군인의 살의에 찬 적의를 느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감당할 수 없는 폭격을 당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끊임없이 글을 써대는 것이었다. 내가 겪은 것, 내가 들은 것, 내가 당한 것들을 하나하나 기억으로부터 가져와 빼곡히 지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진 찍듯이 묘사하고 적어내는 것. 그것이 내가 유일하게 붙잡은 생명줄이었다.
그렇게 유일한 내 산소호흡기와 같았던 글을 내보이자 이제 그들은 내게 “너 소설가냐? 소설 쓰냐?”라는 말을 해왔다. 그러면서 내가 마치 소위 판춘문예라는 조롱을 받는 인터넷 글들처럼 주작이냐는 소리를 해왔다. 나는 열아홉이라는 어린 나이에 머나먼 타지에 가서 “네가 경기도 사람이라 싫다. 네가 하는 말은 서울말이 아니라 경기도 사투리라서 촌스럽다. 네가 좋아하는 피아노 음악은 사탄의 음악이다. 불쌍하니깐 네가 놀아줘라.” 라는 류의 말들을 끊임없이 들었고 나는 의기소침하고 우울한 대학생활을 했다. 같이 공부할 사람이 없어서 식사는 혼자 동아리 구석진 방에서 하고 시험에 떨어지자 그곳 생활이 너무 진절머리가 나서 새 스터디원을 구해서 노량진에서 재수생활을 시작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만 하필 운이 없는 학번이라 임용 티오가 대폭 줄어들어서 지역 가산점이 있는 모교가 있는 곳으로 칠 수 밖에 없었다.
누구 한 사람은 열등감과 질투심과 모난 성격으로 험담도 하고 헛소문도 퍼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믿었던 사람이 다른 사람 말만 듣고 그렇게 쉽게 돌변하고 돌을 던지고 폭언을 하고 사람을 투명인간 시키고 조리돌림에 가담한다는 사실에 어마어마한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 그러면서 지금이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생각이 있고 정의롭고 건전한 인격을 가졌다면 그렇게 무지성으로 누군가를 괴롭힐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럴수록 세상이 썩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어디를 가나 한국이 강약약강의 폭력적인 사회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디를 가나 약자는 조롱받고 무시당하고 페널티를 당하며 환영받지 못한다. 가끔가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들은 예수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귀한 사람이다.
그러면서 나는 한 편 내가 겪은 일들이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럽고 부정의와 폭력으로 얼룩진 상황에서, 쓰레기 더미에서 꽃을 피우도록 사명을 받은 존재. 그렇기에 나를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금 하느님 곁으로 이끌고 많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해주신 것 같다. 내가 겪은 일들을 여기에 일일이 낱낱이 다 나열할 순 없지만, 언젠가 그 모든 것들에 관해 목소리를 내기 위해 글쓰기를 꾸준히 해오고 습작을 쓰고 공부를 해오고 있다. 그들이 내게 조롱섞인 말들로 “너 소설가냐?”라고 한 것에서 힌트를 얻어 진짜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겪은 불행과 고통은 나에게 새로운 꿈을 심어주었다. 나처럼 세상의 모든 억압과 폭력과 불의와 싸우는 약자들과 연대하고 그들에게 힘을 주고 싶다.
투명한 렌즈로 있는 그대로 세상을 비추기 위해, 그리고 결국엔 따스한 한줄기 희망을 전하기 위해 계속해서 계속해서 내 마음을 정결히 하고 사랑과 희망을 키워나가고 싶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