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솜씨 Sep 30. 2020

그림작가가 도시텃밭을 6년 동안 가꾼 이유

가을 텃밭의 아침



결국 정원 일은 나 자신만을 위한 개인적인 건강법과 농사일로서의 의미밖에 가지지 않게 되었다.
눈과 머리가 심하게 아파 오면 나는 뭔가 다른 일을 해야 한다. 몸 상태를 바꿀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여러 해에 걸쳐 나는 그런 목적을 위해 정원 일과 숯 굽는 일을 생각해 냈다. 아마추어의 흉내에 지나지 않지만 이 일은 몸 상태를 바꾸고 긴장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명상에 잠기고 환상의 실을 잣도 정신을 집중시키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내 방식으로 목초지가 숲으로 변하는 곳을 막으려고 애쓰곤 한다.

헤르만 헤세 <정원 일의 즐거움> p.179

몸을 쓰는 일,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일, 키우고 먹는 일. 이 모든 것이 생산적이라 느껴졌다. 필요하고 유의미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일이라 여겨졌다.


그림을 생각하면 고민하게 되는 지점. 예술의 쓸모에 대해 생각하는 쓸모없는 생각. 그런 생각이 애초부터 쓸데없는 고민, 끝이 없는 생각이라 할 지라도 일단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한 번 떠오르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퍼져 내 자신감과 자존감을 저 깊은 바닥 아래까지 내려가게 만든다.

머리로만 하는 고민을 뒤로하고 작업실 근처 옥상 텃밭에 가 밭을 일구고 작물을 돌보고 물을 준다.

몸을 움직이며 텃밭을 가꾸고 그곳에서 자란 작물을 수확해 요리를 하고 먹는다. 나와 가족에게 피와 살이 될 작물을 재배한다는 것만큼 유용하고 쓸모 있고 의미 있는 일이 또 있을까? 나는 예술에 대한 고민의 깊이만큼 생산적이고 유의미한 농사일에 푹 빠져버렸다.

내가 하는 일의 의미, 나의 쓸모에 대한 고민, 그곳에서 오는 자괴감과 죄책감을 덜어 주고 나의 생활뿐 아니라 예술까지 생기 있게 만들어주었다.


2020년 9월. 유래 없는 팬데믹 상황에서도 나는 서울, 도시에서 텃밭을 가꾸고 있다. 여름에 다 자란 작물을 정리하고 늦가을에 수확해야 할 배추와 무를 심고 가꾼다. 지금 나와 내 가족이 알뜰살뜰 보살피고 있는 작물은 올 겨울 우리 가족의 밥상 위에서 가장 사랑받는 반찬이 될 것이다.


텃밭은 내가 도시에서 자연스럽게 걷기 위해 오래도록 지켜온,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지키고 싶은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작가의 이전글 너의 방식대로 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